실체

좌파도서관

실체(한자: 實體, 그리스어: ουσία, 라틴어: Substantia) 또는 본체(本體)는 주로 형이상학에서 사용된 용어로, 변화무쌍한 제 사물의 근저에 놓인, 영속적이며 불변인 것을 의미한다. 실체의 대립물은 우유성(偶有性)이다.

개요

모든 사물, 존재자는 항상 변화한다. 변화하며 갖가지 양태(樣態)를 가지는 수많은 존재자 사이에서 지속적이며 불변적으로 그 규정을 존립하는 것이 실체라고 여겨진다.

실체 개념은 고대 노예제 사회 때부터 존재하였던 개념으로,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플라톤은 오로지 선(善)의 이데아가 실체이며, 현상자(eikona) 및 그것의 모방자(phantasmata)를 허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질료를 이데아가 산출해낸 것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원론적 실체관을 지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실체는 ‘사물의 본질, 실재(實在)’라는 뜻에서 제일의 범주를 이룬다. 그는 《형이상학》에서 실체를 철학의 근본 물음이라 간주하였다:

"다양한 방식으로 ‘있는 것’이 말해지지만, 분명히 그 가운데 ‘으뜸으로 있는 것’(으뜸의 존재)은 실체를 뜻하는 ‘(어떠한 것은) 무엇인가’이다. [...] 정말, 예나 지금이나 늘 묻지만, 늘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은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라고, 어떤 사람들이 하나보다 많다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개수에서) 한정된다고, 어떤 사람들이 무한하다고 주장했던 것이 바로 이 실체였기 때문이다."[1]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로지 이데아만을 실재라고 한 플라톤의 견해에 반대하였으나, 실체에 관한 견해에서는 플라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는 현실태(entelecheia)에 관해, 질료를 목적하는 형식이 아니라 형식을 목적하는 질료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하위 현실태는 상위 현실태의 질료로 되며, 그것은 다시 형식을 목적하는 질료로 된다. 그는 최고의 현실태를 순수형식이라 간주하였다. 형식과 질료의 소재적 근원에 관해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유사한 이원론적 견해를 보였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실체는 보편자·개별자에 관한 모든 신학적 체계 수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T. 아퀴나스는 실체를 신이라 하였고, 신은 순수형식이자 가장 상위의 보편자임을 주장하였다:

"하느님은 하나이듯이 통일된 것을 만들어내었다. 따라서, 사물은 저마다 자체에 있어서 하나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부분들의 다양성을 요구하는 일치에 의한 하나의 완전한 것이다."[2]
T. 아퀴나스,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정규토론》, 제7절, 제9항.

아퀴나스는 어떠한 하나에 대한 수많은 개별자가 존재한다고 할 때, 특정한 류의 개별자 집합이 ‘(특정한) 것의 개별자’로 될 수 있는 이유로 형식을 들었다. 모든 개별자에는 개별자의 대상으로서 보편적인 ‘그것’, 즉 형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개별자가 하나의 보편을 가짐에도 서로 다른 이유는 질료 혼재의 비중 여하에 따라 달렸다고 하였다. 그는 보편자 역시 상위의 보편자의 개별자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자는 실체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상을 전개하였다.

근세에 이르러 등장한 R. 데카르트는 전통적인 실체 개념을 간직한 채로 스콜라적 논변을 비판하였다. 그는 정신을 사유(思惟)의 실체로, 물질은 연장(延長)의 실체라고 하였으며, 사유를 정신의 속성, 연장을 물질의 속성이라 하였다.

B. 스피노자는 실체에 관한 데카르트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계승였다. 그는 《에티카》에서 연장과 사유를 실체의 속성으로, 그리고 정신과 물체를 각각 연장의 양태, 사유의 양태로 규정한다. 그는 모든 존재자에 관한 ‘실체(substantia)-속성(attributum)-양태(modus)’라는 산출·변용 원리를 정립한다. 그는 능산적이며 동시에 소산적인, 즉 부단히 변용하며 제 양태를 산출하면서도(능산적), 동시에 그 자신이 산출되어진 수많은 현존하는 것에 대한 규정을 받는(소산적), 이른바 ‘전일적 실체’를 주장하였다. 스피노자는 그 속성이 하나의 본질을 표현한다고 말하고, 어떤 때는 각 속성이 실체의 본질, 실체의 존재 혹은 실체성을 표현한다고 말하며, 각 속성이 실체적 실존의 무한성과 필연성, 다시 말해 영원성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이 ‘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실체와 양태를 연결한다. 스피노자는 무한자로서 무한한 실체와 그것의 변용으로 규정될 수 있는 상대적인(그리고 유한한) 실체로서 전일적 체계 속에 묶여진 제 양태를 말한다.[3]

실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은 이후, 경험주의(J. 로크, D. 흄[4] 등에 의한)와 변증법이 발달하기 전의 모든 철학 분야에서 통용되었다. 이는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표적으로 엘베시우스와 P. H. D. 홀바흐는 물질을 제 사물의 실체라고 주장하였다.

실체는 형이상학적 개념이지만, G. W. F. 헤겔의 저작에서도 등장하며, 그의 사상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적 관념론에서 실체는 시원(순수지 또는 절대지)에 대한 형식규정으로 간주된다. 그는 독일 스피노자 학파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피노자의 전일적 실체로서 실체와, 속성-양태로 전개되는 제 양상으로서의 상대적인, 동시에 유한한 실체를 각각 능동적 실체, 수동적 실체라 표현하고, 둘 사이의 변증법적 운동에 관해 기술하였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형이상학적 실체 개념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실체 개념은 그 스스로가 모순적 대립 운동을 통해 변화·발전하는 물질에 적용되기 어렵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실체 개념은 단지 제 사물의 근원자를 추상적으로, 형식적으로 일컫는 데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될 뿐이다.

A. 쇼펜하우어, F. 니체, K. 야스퍼스, M. 하이데거 등 대다수 주관적 관념론자들은 실체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 문헌

  •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편 (1989), 《철학대사전》, 동녘.
  • 아리스토텔레스, 김진성 역주 (2007), 《형이상학》, 이제이북스.
  • T. 토마스, 박영도 역 (1993), 《토마스 아퀴나스 선집》, 이문출판사.
  • B. 스피노자, 강영계 역 (1990), 《에티카》, 서광사.

같이 보기

각주

  1. 《형이상학》, 1028a-b.
  2. 《토마스 아퀴나스 선집》, 제4절.
  3. 양태는 실체가 아니며, 스피노자의 학설에서 실체는 오로지 신(자연) 하나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은 내재적 원인으로서, 산출된 모든 것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산출된 것들, 즉 변용에 의해 생성된 양태을 전일적으로 아우를 경우 이 역시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실체가 된다.
  4. 흄은 실체 개념을 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