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파리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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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4일 (일) 01:22 판
1889년 파리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는 바스티유 요새 습격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제노동자대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 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이다.
배경
1864년 창립된 제1 인터내셔널은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표자회의에서 해산이 결정된다. 제1인터내셔널이 해산된 이유는 파리코뮌 패배 이후 곳곳에서 탄압이 벌어져 인터내셔널의 각 지부가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바쿠닌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분파투쟁이 격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제1인터내셔널이 이미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여,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의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1 인터내셔널은 각국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당들의 출현을 위한 토대를 형성하였다. 실제로 독일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덴마크, 미국,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웨덴, 핀란드 등에서 당들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당의 창설은 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내었다.
제1 인터내셔널은 해산되었지만,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 연대는 확장되었고 여러 나라 운동의 지도자들은 지속적인 접촉을 유지하였다. 다른 나라의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고 여러 가지 캠페인을 수행하는 것은 통례가 되었다. 사회주의 신문은 다른 나라의 노동운동에 관한 정보의 전달범위를 늘려갔다. 이는 경험의 교환과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 정신에 의한 노동자 교육을 촉진하였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군사적 충돌 위협과 식민지 확장에 대항한 공동의 호소문들이 자주 나왔으며, 군국주의와 전쟁 위협에 대한 투쟁은 각각의 민족들에 속한 프롤레타리아트를 단결시켰다. 신문, 사회민주주의당 의원들, 그리고 노동자 모임은 지배집단의 국수주의적 정책을 단호하게 비난했고, 이러한 정책들의 반민중적 성격을 폭로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의 실행을 옹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신문들, 각 정당의 당대회, 그리고 노동조합들은 새로운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연합의 조속한 결성을 더 많이 요청하게 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국제적인 노동자대회를 제안했다.
전개
1889년 7월 14일,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적 연합을 결성하는 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특이한 상황이 발생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하나는 가능주의자들에 의해 국제대회가 개최되게 된 것이었다. 엥겔스는 국제적 연합이 가능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도록 맑스주의자들을 조직하였고, 바스티유 요새 습격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제노동자대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20개국 대표자 391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참가자 대부분은 유럽 국가를 대표했고, 유럽 이외의 국가에서는 미국과 아르헨티나의 대표자가 참가했다.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국제 노동입법과 노동 보전에 관한 결의를 했다.
“ | 노동과 인류의 해방은 국제 규모에서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며, 이를 위해 노동자계급이 자본소유를 탈취하고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정치권력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 “ |
대회는 8시간 노동제의 입법화 요구, 아동노동 금지·연소노동자 및 여성노동 보호 요구, 야간노동과 유해작업에 대한 특별 규제 요구, 주휴제의 의무 제정, 임금에 대체하는 현물지급 금지, 남녀 노동자에 대한 민족 차별 없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제한없고 완전히 자유로운 단결과 결사의 권리, 공장감독의 국가제도 수립 요구, 그리고 상비군 폐지와 온 국민의 무장을 결의했다. 이런 요구들은 그 뒤로 오랜 기간에 걸쳐 생활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국제 노동자계급 운동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창립대회에서 한 가장 중요한 결정은 5월 1일을 국제 노동운동의 시위의 날(노동절)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는 8시간 노동일을 위한 총파업을 결정했던 미국 노동총동맹의 제안을 지지한 것으로, 실제 이듬해인 1890년 5월 1일에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거리를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