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파리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좌파도서관

1900년 파리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는 1900년, 국제노동자대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의 다섯번째 대회이다.

배경

1895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으로 1898년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공화파는 왈덱 루소(Waldeck Rousseau) 내각을 출범시켰는데 이 내각에 사회주의자 알렉상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이 상공장관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유럽에서 사회주의자가 내각에 참여한 처음 사례였고, 혁명 이념과 개량적 실천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조레스(Jaurs)는 밀레랑의 행동을 두고 '새로운 전술'의 모범, '부르주아지에 대한 정치적 탈취'로 표현했다. 밀레랑 옹호 진영은 입각이 기존체제 내에서 부분적인 개량 성과를 얻어낼 수 있으며, 반동 요소를 일정정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쥘 게드(Jules Guesde)를 비롯한 반대 진영은 밀레랑의 행동이 당의 목표를 희석시키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원칙에 배치된다고 비난했다. 프랑스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일어난 논쟁은 1900년 파리 대회까지 이어졌다.

전개

1900년에 열린 파리 대회에는 22개국의 대의원이 참가했다.

인터내셔널은 운동의 통일을 위협하는 논쟁의 격렬함에 불안을 느껴 양 진영의 타협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카우츠키가 발의한 결의안은 "개별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정부에 입각하는 것은 정치권력 획득의 정상적인 출발점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며, 항상 잠정적이고 예외적인 임시방편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있을 수 있다. 어떤 주어진 상황이 그런 불가피한 상황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전술상의 문제이지 원칙상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 대회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는 내용이었고, 카우츠키의 결의안은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총파업을 둘러싸고도 논쟁이 확대되었다. 1900년 파리 대회에서 프랑스 게드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철폐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혁명 수단으로서 세계 규모의 총파업을 제안했다. 각국 대표들은 총파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이 제안은 대회에서 부결되었고, 총파업 문제는 1904년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에서 다시 제기된다.

또한 평화·군국주의·상비군의 문제를 토의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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