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좌파도서관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는 1907년, 국제노동자대회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의 일곱번째 대회이다.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의제로 '군국주의와 국제분쟁'이 선정되었으며,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논쟁과 더불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중도, 수정주의 우파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갈등도 심해졌다. 모든 논쟁은 학파간의 차이와 국제 사회주의 내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분열의 징후를 드러냈다. 다수파가 유럽전쟁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반적 정책을 원했던 반면, 좌파들은 자본주의 전쟁에서 영원할 수 있는 혁명에 관심을 가지면서 역사적 시각과 전략에서 심대한 차이를 드러냈다.

공동 결의안 준비를 맡은 위원회의 논쟁은 이런 다양한 관점을 반영했다. 에두아르 바이앙, 장 조레스는 의회개입에서부터 총파업과 폭동에 이르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전쟁을 방지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요청했다. 사회주의자의 전술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총파업에 반대한 독일 대표는 이 제안에 격렬히 반대했다. 합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중재를 위한 소위원회가 구성되어, 로자 룩셈부르크레닌, 마르토프가 '전쟁은 발발해서는 안 되고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킬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하고,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 정치적 위기를 이용해 모든 힘을 다해서 대중들이 자본주의 계급 지배를 빨리 중단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대표들이 이 좌파적 개정안을 채택했지만, 이들 중 다수는 이것이 가상의 미래일 뿐이라며 결의안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임박한 혁명'은 부르주아를 협박하는데 효과적이었을 뿐, 전략적 목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결의안은 방어전쟁과 제국주의 전쟁을 구별하는 사람들과, 민족적 방어와 계급투쟁을 찬성하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을 무시했다. 이 문제는 순전히 이론적일 뿐 긴급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합의는 불가능했고, 이 갈등은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이 무딘 결의안은 사회주의 반전행동에 복무하지 못했으며, 인터내셔널에 존재하는 분열을 영속화했다. 역설적으로 이 결의안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켰다. 레닌은 결의안이 개량주의에 대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SPD 지도부는 극단주의에 대한 승리라고, 조레스는 국제 정책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의 결정적 승리라고 보았다.

분명 슈투트가르트 대회는 전환점이었다. 슈트가르트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전쟁에 반대한다는 결의를 선언하고, 반대를 실천하기 위해 반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인터내셔널에서 SPD의 권위는 분명한 타격을 받은 반면, 프랑스 사회주의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획득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두 '열강' 사이의 갈등은 남아있었으며, 좌파와 중앙파, 우파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고,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 전략에 대한 문제가 격렬하게 논쟁되었다. 비록 논쟁이 인터내셔널의 일반 방침이나 활동들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에 사회주의의 국제 정책에 대한 논쟁은 완전히 이론적 영역으로 격하되지 않았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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