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 기획편 ▼ 베트남 전쟁 기획편 ▲
|
Chiến tranh Việt Nam Vietnam War | ||||||||||||
전쟁정보 ▼ 전쟁정보
▲
| ||||||||||||
교전국 ▼ 교전국
▲
| ||||||||||||
지휘관 ▼ 지휘관
▲
| ||||||||||||
병력 ▼ | ||||||||||||
피해규모 ▼ 피해규모
▲
| ||||||||||||
627,000 - 2,000,000 명[1] |
개요
침략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융단폭격 및 대량의 고엽제를 살포하여 수많은 인명피해를 만들었다. 그러나 호찌민의 지휘아래 단결한 베트남인들은 미국과 남베트남 우익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고, 1975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 | 1964~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웠을 때, 그것은 조직화된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조직화된 인간사이의 싸움이었으며 결국 인간이 승리했다. | “ |
- 하워드 진, 유강은(역), 『미국 민중사 2』, 이후, 2008, p.207 |
“ |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비밀리에 시작됐습니다.그것은 30년 후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패로 끝났습니다. 자질있는 사람들이 선의에서 시작한 것이었지만, 치명적인 오해와 미국의 힘에 대한 과신과 냉전으로 인한 오산에서 비롯했습니다. 전쟁은 장기전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양 당에서 배출한 5명의 미국 대통령이 오판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보다는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쉬웠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5만 8천 명 이상의 미국인이 죽었고, 남베트남군도 최소 25만 명이 전투에서 죽었습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게릴라는 100만 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남과 북을 합쳐 200만의 민간인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인근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수십만 명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많은 베트남인에게 이것은 잔인한 내전이었고 다른 이들에게 이 전쟁은 한 세기에 걸친 독립투쟁의 절정이었습니다. | “ |
- PBS 베트남 전쟁 1화 |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 전쟁은 북베트남의 침략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며, 제네바 협약을 먼저 위반한 것도 미국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은 미제국의 침략전쟁이었다. 쉽게 말해 프랑스가 치렀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상이라고 보면된다. 즉 그 침략의 주체가 프랑스에서 미제국으로 바뀐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은 스페인 내전과 함께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전쟁으로 불린다.(#링크 필요) 민주화 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리영희 교수 또한 자신의 저서 '베트남 전쟁' 서문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 연고와 명분이 전혀 없는 미국이 남베트남이라는 괴뢰정권을 지원하여 북베트남을 공격했기 때문에 전세계인들의 반발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엄청난 비판이 있었다. 현재 베트남 전쟁의 미국 개입을 긍정하며 역사를 왜곡하는 쪽은 남베트남 출신 망명객이나 한미 극우세력 정도이다.
배경
19세기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1858년 프랑스군이 다낭에 상륙한 시점부터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됐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통킹, 안남, 코친 차이나로 3등분해서 통치했다. 프랑스 당국의 식민 지배와 착취가 강해짐에 따라, 베트남 내에서는 독립운동이 전개됐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프랑스에 맞서 싸우다 희생됐다. 베트남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서, 호치민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뭉치게 됐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베트남 내에서도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확산됐다. 베트남의 사회주의 운동은 1920년대부터 활발해졌고, 1930년에는 현재의 베트남 공산당이 창설됐다. 베트남 공산당은 이후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1940년 프랑스가 조기에 나치독일에게 항복했다. 프랑스가 나치에게 항복하게 되자, 나치의 동맹세력인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접수했다. 처음에 베트남인들은 일본군의 진주를 환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제국주의가 프랑스 제국주의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악랄한 침략자임을 알게 됐다. 당시 중국에 있던 호치민은 일본이 침략한 시점부터 이들을 제국주의자로 간주했으며, 1941년 해외로 간지 30년 만에 베트남에 돌아와 독립운동 단체인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을 창설했다. 베트민은 일본과 프랑스 비시정부에 맞선 투쟁을 지속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자, 미국 OSS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민 병력 중에 200명 이상을 최정예 부대로 훈련시켰고, 이는 결국 미국 입장에서 호랑이를 키운 셈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난 뒤, 베트남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호치민은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은 선포한다. 그러나 연합국은 베트남의 독립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고, 북위 16도선을 기점으로 북에는 중국군이 남에는 영국군이 입성한다. 중국군의 경우 1946년 국공내전을 전후로 하여 철수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당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는 프랑스를 끌어들였고, 영국군 철수 이후의 프랑스가 들어오자 이는 베트남과의 마찰로 이어졌다. 1946년에 호치민은 퐁텐블로에서 프랑스측과 회담을 가졌지만, 협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베트남과 프랑스의 갈등은 격해졌고, 이는 결국 프랑스가 하이퐁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게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미국은 도미노 이론에 심취하여 프랑스에게 식민지 유지하랍시고, 전비의 80%를 지원했지만, 베트남 민중으로 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던 프랑스는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2] 이러한 미국의 전쟁비용 지원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증가했는데, 1950년 11월 경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미국이 지원한 경비가 1,000만 달러였다가 매년 수억 달러로 증가하여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에는 10억 달러를 초과했다. 오히려 1950년을 기점으로 호치민과 공산당이 지휘하는 베트민 세력들이 프랑스군을 여러곳에서 격퇴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결국 프랑스는 1954년 5월 7일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대패하면서, 전쟁에서 패배한다. 56일간의 포위 끝에 베트민은 프랑스군 2,293명을 사살하고 11,721명 이상을 포로로 잡는데 성공함으로써 베트남은 영광스러운 승리와 독립을 쟁취했다.[3]
경과
베트남의 분단
“ | 당시 분위기는 제네바극동평화회의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서방 세계나 프랑스에 대대적인 양보를 했다는 감상주의가 지배적이었다. 모든 베트남 사람들은 총선거가 북측의 승리로 끝나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그의 회고록에 ‘호치민 정권이 통일 베트남을 지배할 가능성이 있다’고 서술했으며, 90% 이상의 미국인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미국의 여론은 호치민이 통일 베트남의 실력자가 될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반면, 미국 정부는 도미노 이론을 철저히 믿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호치민이 남북베트남을 장악하는 사태를 단호하게 차단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 “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102 |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베트남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분명히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을 실시해야 했지만,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미국은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이라는 베트남판 이승만을 앞세워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자신들의 친인척들을 남베트남 내각에 대거 편입시키는가 하면, 토지를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할당했고, 대다수의 민중이 믿는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한다. 석가탄신일을 없애는 것은 물론 지엠 정권은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뿐만 아니라 응오딘지엠 정권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맞서 대불항전을 전개하던 베트민 잔존세력들까지 탄압했다.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뉴는 남베트남에서 비밀경찰을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한다. 이 과정에서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응오딘지엠 정권의 억압적인 정책이 계속되자 남베트남에서는 자체적으로 반응오딘지엠 조직이 창설되는 데, 그게 바로 베트콩이다.
그런 과정에서 북베트남은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60만 명의 가톨릭 교도를 포함한 80만 명이 월남하는 사태가 있었는데,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부는 토지개혁으로 의도치 않게 가톨릭을 탄압하기도 했지만, 북베트남에 남아있던 가톨릭 90만 명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토지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최소 2,500명에서 15,000명이 처형되는 유혈사태가 있었지만, 호치민 주석의 철저한 자아비판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조치 및 지도부의 공개적인 사과행위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토지개혁은 많은 민중에게 토지를 분배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4] 미국과 응오딘지엠 정권이 일방적으로 분단의 길을 걷자 호치민과 북베트남 또한 1959년 부터는 남부 통일을 공식적인 목표로 세우게 된다.
호치민과는 반대로 응오딘지엠은 대힌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Syng Man Rhee)처럼 미국의 구미에 아주 잘 들어맞은 인물이었다. 우선적으로 그는 식민지 시절 20년간 고위 관료로 일했던 경력이 있었고, 망명 초기 벨기에에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몇 년간 미국서 살던 인물이었다. 거기다 그는 아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이런 점은 미국 정치인들에게 좋게 비추어졌다. 냉전이 한참이던 당시 미국은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을 철저히 믿고 있었다. 도미노 이론이란 한 나라가 공산화 되면 다른 나라도 덩달아 공산화 된다는 이론으로써, 만일 베트남이 공산주의가 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공산주의가 된다는 이론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가 내세운 괴뢰황제 바오다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풀었듯이 미국은 공산주의에 맞서 방어벽을 만들기 적합한 곳으로 남베트남을 선택했고, 과거 프랑스가 일정부분 통치하다 물러난 지역에 새로운 민족주의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은 미국에서 살던 반공 민족주의자 응오딘지엠에게 남베트남의 대통령 자리를 앉혀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응오딘지엠 정권은 부패하고 무능했다. 민중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반공 독립운동가라며 찬양하기 바쁘지만, 그의 일가족은 죄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부역한 집단이었다. 호치민이 이끌던 북베트남은 정통성에 있어서 항일 항불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찔러 독립을 쟁취했던 업적이 있었다. 그에 반해 디엠 정권의 그렇지 않았다. 새로들어선 남베트남의 군대는 과거 프랑스가 창설한 베트남 괴뢰군에 있던 인물들이 군사에 있어 주요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후 남베트남에서 정권을 잡게 되는 즈엉반민 장군이나, 응우옌 까오 끼, 응우옌반티에우 등 하나같이 프랑스군에서 복무했던 인물들이었다. 디엠정권의 내각은 중세시대의 족벌정치를 연상시켰다. 남베트남의 내각은 민주적인 투표로 결정된 인물들이 아닌 가톨릭 신자들과 디엠의 일가친척들로 구성됐다. 즉 응오딘지엠이 원하는 인물들로만 구성되었다. 응오딘지엠은 동생 응오딘 누를 수석보좌관으로, 응오딘 누의 부인 마담 누를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 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 자기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 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 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내주었다.
정리해보자면 당시 북베트남에선 일정부분 한계에도 불구하고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응오딘지엠 정권은 토지개혁에도 실패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디엠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토지를 할당했고, 민중 대다수가 믿는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석가탄신일을 불법화하여 불교도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몇몇 절들을 습격하여 불교도들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베트민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고 구금했다. 이것이 결국 민중이 응오딘지엠을 지지하지 않게 된 이유였다. 미국의 역사학자 마릴린 영에 따르면 그의 집권 초기 12,000명이나 되는 이들이 처형당했다.[5] 따라서 이러한 나라가 미국이 지원하는 자칭 자유민주주의 국가 남베트남이었기에, 민중이 이 나라를 버리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미군의 남베트남 개입
“ | 1.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 민족민주연합정부의 수립
2.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 3.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경제의 건설 4. 소작료 경감과 점진적 토지개혁 5. 민족문화의 건설 6. 인민의 군대 건설 7. 남녀동권, 민족평등, 재베트남 외인과 재외베트남인의 권리보장 8. 평화적 중립적 외교정책 9. 남북 베트남의 관계정상화와 평화적 통일 10. 세계평화 옹호 |
“ |
-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개정판)』, 창비, 2006, p.415 |
위에 상술된 강령은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투쟁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라는 공식 명칭을 가진 베트콩은 1960년 12월 캄보디아 국경지대에서 자체적으로 창설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응오딘지엠의 남베트남 정권은 그저 프랑스에 협력하던 관료들과 부패세력이 다스리는 나라였을 뿐이었다. 그들은 남베트남 정권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고, 민심은 남베트남 정부를 떠났다. 응오딘지엠이라는 베트남판 이승만을 앞세웠던, 미국은 도미노 이론에 따라 베트남 사태를 주시했고,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군사 고문단들을 파견한다. 그리고 그 군사 고문단의 숫자는 1960년 대 초 미국의 존F케네디 정권 때 상당한 규모로 커진다. 케네디 정부는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 형식으로 특수부대를 보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비밀작전을 수행했고,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는 몬타냐드(Montagnard)라고 불리는 산악 소수민족들을 포섭하여 베트콩에 맞서도록 했다.[6] 또한 라오스에서는 대중적 지지를 받던 파테트 라오에 맞서 소수민족 몽족(Hmong)을 포섭하여 공산주의에 저항하도록 했다.[7] 미국은 APC 장갑차량과 UH-1 헬기와 수송헬기 등을 남베트남에 지원했다. 케네디 집권 말기인 1963년에는 몇백명이었던 미군사고문단의 숫자가 16,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불과 2년도 안되는 사이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막장 짓을 일삼았다. 대표적인 예로 1963년 6월 11일 수도 사이공에서 있었던 고승 틱광둑의 소신공양이 있다. 불교도 탄압에 맞서 틱광둑 스님이 소신공양을 하자 응오딘지엠의 재수인 마담 누가 한 말은 중놈이 한거라곤 바베큐가 된 것 밖에 없어라는 망언이었다. 뒤어어 더 많은 불교 승려들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반대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분신자살하기 시작했다. 응오딘지엠의 경찰은 불교 사원을 습격, 30명의 승려에게 부상을 입히고 1,400명을 체포했으며 사원들 폐쇄시켰다. 사이공에서도 학생괴 승려를 비롯한 민중들의 시위가 잇따랐는데,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9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옛 베트남의 수도였덧 후에에서는 1만 명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8] 응오딘지엠 정권은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민간인을 죽였는데,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 역사학자인 폴 토머스 체임벌린에 따르면, 시위대와 경찰 및 군 병력의 충돌로 약 1,400명이 죽었다.[9]
응오딘지엠 치하의 남베트남 정권 군대는 전투에서도 베트콩에게 상대가 안됐다. 1963년 사이공 근처의 마을에서 일어났던 압박 전투(Battle of Ap Bac)에서 남베트남군 1500명과 베트콩 300명이 교전을 했었는데, 남베트남군이 베트콩의 전사자 보다 4배나 많았고, 남베트남군을 지원한 미군 헬기 5대가 격추당했었다. 심지어 수송장갑차량인 APC 8대와 헬기 15대를 투입했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APC 장갑차 3대도 베트콩에 의해 파괴됐다. 쉽게 말해 그런 최신식 무기가 있었음에도 남베트남군은 허접한 모습을 보엿다는 얘기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1963년 11월 응오딘지엠 정권을 전복시켰다. 두옹반민 장군이 지휘하는 쿠데타 세력들이 정권을 잡기가 무섭게 처음시작된 쿠데타는 또 다른 쿠데타를 지속적으로 발생시켰다. 그런 내부 쿠데타는 1963년 응오딘지엠이 권력을 가진 시점부터 20개월 동안 10번 이상 일어났고, 1965년 베트남의 박정희라 할 수 있는 응우옌 반 티에우가 정권을 잡으면서 마무리 된다. 물론 정권을 잡은 응우옌 반 티에우 정권도 부패하기는 매한가지였다.[10] 당연히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던 미국은 남베트남의 자체적인 붕괴와 도미노 이론을 걱정하였기에 남베트남 문제에 개입했다. 개입을 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 남베트남 국토의 75%를 베트콩이 장악하고 있었다.[11] 1960년대 미국과 응오딘지엠 정부가 만든 이른바 전략촌(Strategic hamlets)은 1963년 말 무렵에 무려 80%나 파괴된 상태였다.[12] 따라서 이대로 가다보면 남베트남이 붕괴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1964년에는 북베트남 영해에서 그들을 도발하는 치졸한 짓까지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통킹만 사건이다. 케네디 취임 이후 1963년 말까지 베트남에서 사망한 미군의 숫자는 75명이었는데, 1964년을 기점으로 미군 사망자는 급격히 급증하게 된다.
통킹만 사건
“ | 미제국주의와 사이공의 괴뢰들은 항공기와 함정으로 베트남공화국의 영공, 영해를 빈번히 침범하면서 스파이 활동과 파괴활동을 위한 많은 돌격대를 잠입시키고 있다. 7월 30일, 미제국주의와 사이공정권의 군함은 북베트남 영내의 두 개의 섬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8월 1일, 라오스 방면에서 침범한 T-28형기 4대가 게안 성의 남칸 국경감시소와 눈데 읍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남칸 감시소는 8월 2일에도 라오스 방면에서 침입한 7대에 의해서 공격을 받았다. 7월 31일부터 8월 2일에 걸쳐, 미국 해군 구축함이 베트남공화국의 연안에 접근, 초계중인 베트남공화국 해군 초계정에 대해 공화국의 영해상에서 발포했다. 초계정은 이에 응전, 이를 공화국 영해에서 추방했다. 8월 3일 오후 11시, 타이콘테로가 기동함대의 엄호하에 군함 4척이 공화국 영해에 침입, 구앙빈 성의 론, 데오 강 양 지구에 포격을 가했다. 8월 5일 오후 0시 반부터 5시까지, 통킹만에 정박한 콘스털레이션, 타이콘테로가 두 항공모함에 발진한 스카이레이더기는 공화국 영내 각지를 수차례에 걸쳐 공격하고 폭격을 가했다. 공화국 인민해방군과 인민은 이들을 반격, 그중 3대를 격추하고 3대에 손해를 입혔다. 조종사 장교 1명을 사로잡았다. | “ |
-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개정판)』, 창비, 2006, p.431~432 |
위에 있는 인용문은 리영희 선생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에 나온 통킹만 사건에 대한 북베트남측 외무성 발표다. 1964년 남베트남의 내부 총질을 보고 있던 미국은 결국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한다. 1964년 2월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단행하기에 앞서 이른반 북베트남에 대한 북폭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모든 세밀한 상황조작을 추진했고,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34A라는 일반 암호 아래 북베트남에 맞서는 일련의 비밀활동 계획을 추진할 것을 승인했다. 폴 하킨스 장군(Paul Harkins)의 명령에 따라 진행된 이 작전의 궁극적인 목적은 북베트남측으로 하여금 남베트남에 가한 압박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은밀한 작전은 미국 대통령 존슨이 명령하고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의 책임하여, 연합참모부에 설치된 ‘반란진압·특수활동 담당 특별보좌관실’이 지휘했으며, 이에 따라 북베트남에 대한 비밀작전을 실행함과 동시에 미국은 이 작전의 일환으로 라오스에 대한 공중작전을 실행했고, 미국 민간항공 에어 아메리카(Air America)를 가장한 미국 CIA 소속기와 조종사가 이 작전에 참가했다.
1964년 7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전선과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했던 인물인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William Westmoreland)가 남베트남 주둔 미군 부대 사령관이 되었다. 총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의 지휘하에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촉발하기 위한 작전을 7월 말에 실행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북베트남령의 섬들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64년 7월 31일 남베트남 공격 보트들이 다낭을 떠나 북베트남 영해에 진입했다. 이들의 공격 목표는 북위 19도선에서 60마일 떨어진 북베트남 연근해의 섬들이었고, 해안에서 최소한 8마일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지시에 따라 구축함 매독스(USS Maddox)호는 해안에서 동남방 100마일 해역에서 통킹만을 향해 베치 되었다. 1974년 7월 31일 남베트남 무장 보트들은 북베트남의 섬 혼메(Hon Me)와 혼니우(Hon Nieu)에 상륙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상륙했던 이들은 집중적인 포격이 몇 분 동안 이어지는 사이 상륙정PT를 타고 뭍에 오른 병사들은 후퇴하던 게릴라들을 송두리째 섬멸했다.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은 1972년에 출간한 베트남 전쟁을 다룬 저서 『최고의 인재들』에서 이 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 1964년 이른 여름에 34A 작전활동은 강렬해졌다. 남베트남에서의 전쟁은 잘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북베트남을 후미에서 공격하는 방식을 취한 미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이 전개되고 있으며 전쟁에 내재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하노이에게 슬그머니 경고하고 있었다. 전복의 시도는 예상되로 헛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같은 시기에 비록 북베트남에 별다른 손해를 입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던 것은 사전에 발표도 없이 라오스 국경지역에 가한 폭격과 해안에 위치한 북베트남의 해군 시설에 대해 남베트남이 초계어뢰정으로 치고 빠지는 습격이었다. 후자는 큰 피해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북베트남에서는 보복의 압박이 커져갔다. 초계어뢰정으로 기습하는 일은 하킨스와 맥 번디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베트남의 선원들까지 참여시킨 가운데 계획되고 시작되었다. 맥나마라와 러스크는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작전을 조종했다. 그것은 사실상 미국의 작전이었다. | “ |
- 데이비드 핼버스탬, 송지은·황지현, 『최고의 인재들』, 글항아리, 2014, p.659~660 |
남베트남 툭수부대가 북베트남의 섬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매독스 호가 통킹만으로 진입한지 36시간이 지난 8월 2일 호놀룰루에 있는 미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전문을 보냈고, 이에 따라 매독스 호가 3척의 북베트남 어뢰정과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파괴되고 1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다만 미군 측 부상자는 한명도 없었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듀이커에 따르면 1차 교전에서 북베트남측이 발포한 이유는 “그 지역 베트남민주공화국 지휘관들이 두(통킹만 영해의 매독스호와 남베트남군의 북베트남측 섬의 상륙을 가리킨다.) 작전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고, 현장에서 미군 전함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매독스 호가 북베트남의 어뢰정과 교전을 벌이자 국방부와 국무부의 긴급 조치 관련 지휘부 인사들은 본격적인 베트남전 비상근무체제에 돌입하게 됐다.
전문을 받은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또 다른 구축함 터너 조이(Turner Joy) 호에게 매독스 호와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따라서 8월 4일 이른 시각 2척의 미국 군함이 암호명 데 소토(DE SOTO)라는 정보 수집 임무를 띠고 급파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34-A 작전에 동원된 남베트남 전투함들도 북베트남 시설들을 공격했었다. 1964년 8월 4일 존슨 행정부는 존슨 행정부는 매덕스와 터너조이 구축함이 또 한 차례 공격을 받았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두 구축함은 북베트남 연안으로부터 22km 이내로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 날 주위에는 북베트남 함정이 하나도 없었다. 북베트남으로부터 실제적인 공격은 없었지만 미국의 구축함들은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한 수중음파탐지기와 무선 신호를 발견했다. 매덕스호의 존 헤릭(John J. Herrick) 대령이 국방부에 전문을 보냈다.
위에 상술한 전문은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았고, 두 번째 공격에 관한 전문을 받게 된 존슨 대통령은 당일 저녁 대국민 선언문을 발표했다. 존슨이 발표한 대국민 선언문이 있기가 무섭게 다음 날인 8월 5일 미공군을 출격시켜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 석유 저장소 등 4개소를 공격하고 어뢰정 및 그 밖의 함정 25척을 격침 또는 격파했다. 이것은 존슨 대통령의 북폭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통킹만에 대한 보복공격으로 북베트남 폭격을 개시한 미국은 당시 북베트남을 폭격한 미군 조종사 1명을 포로로 붙잡았고, 이 포로가 바로 베트남 전쟁 최초로 북베트남측에게 붙잡힌 미군포로였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자신의 책에서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의 보복성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 존슨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시간은 이미 폭격기들이 발진한 다음이었다. “오늘 통킹 만의 공허상에서 미국 군함들을 공격하는 새로운 적대 행위가 있었습니다. 나는 미국 군대에게 이에 상응하는 군사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첫번째 북폭에서 64대의 해군 전폭기들이 17도선 위에 자리잡고 있는 빈(Vinh)의 항구 시설과 유류 저장 시설들을 폭파했다. 국방부는 북베트남 유류 공급 시설의 10%가 파괴되었다고 평가했다. 10분 동안 올린 전과였다. 미국은 1964년 8월 5일 오전 11시, 아무런 선전 포고도 없이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게 된 것이다. | “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203~206 |
베트남 전쟁의 시작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1964년 10월 사이공 근처에 있는 비엔호아 공군기지가 공격 받았는데, 헬기 및 항공기 수십대가 지상에서 연쇄적으로 파괴되었다. 이중에는 B-57 폭격기 5대도 있었다. 1964년 12월엔 수도 사이공으로 부터 30km 정도 떨어진 빈 지아에서 베트콩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병력상으로 2.5배나 많은 남베트남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전투에서 승리했었다. 빈지아 전투에서 베트콩은 32명이 전사했지만, 미군사고문단에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군은 압도적인 장비와 화력에도 불구하고 201명이 전사했다. 쉽게말해 대패한 것이다. 심지어 빈지아 전투 소식을 들은 호치민은 작은 디엔비엔푸 전투라 표현할 정도였으며, 1963년 압박 전투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여러지역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13]
1965년 2월 7일 베트콩은 중부 고원 지대에 있는 미국 육군의 플레이쿠 기지를 습격해 미군 8명이 전사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미군 헬기 7대를 파괴했다. 그러자 미국의 린든 B 존슨은 1965년 2월 롤링썬더 작전을 개시하여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3월에는 남베트남의 휴양 도시인 다낭에 대략 3500명 정도 되는 규모의 미해병대를 파병한다. 이에 따라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과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그리고 태국도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은 전투에서 무능력한 모습만 보였고, 베트콩은 보기 좋게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65년 5월 말에는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 며칠 동안의 전투 끝에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완전히 괴멸시키기도 했다. 1965년 6월 남베트남군은 동쏘아이 전투에서 미정규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트콩보다 3.5배나 더 많은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다. 추가적으로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20명도 같이 전사했다.
이런 상황이었음데도 불구하고 남베트남 정부는 싸울의지도 전투를 치를 역량도 없었다. 즉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지고 난 이후에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이들 또한 응오딘지엠 처럼 부정부패하고 무능했던 것이다. 응오딘지엠 정권 전복 이후 쿠데타를 종지부시키고 정권을 잡은 응우옌반티에우 또한 부정부패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미국의 동맹국이던 남베트남군은 미국의 막대한 물적 인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미 국방부 자료에 의하면, 1966년 한 해에 12만 4000명의 남베트남 병사들이 탈영했다. 이는 남베트남 지상군의 21%에 해당되는 숫자였다.[14] 1967년 미국 군부는 남베트남 정규군의 80%가 비효율적이라고 판정했다. 그들의 작전은 ‘찾으면 피하라’로 알려져 불신과 혹평을 받았다. 따라서 미국은 무능하고 부패한 남베트남군을 대신하여 더 많은 지상 병력을 파견했다. 더 많은 미군이 참여하게 됨에 따라 전쟁 또한 추악하고 잔혹해졌다. 미군은 고엽제를 살포하며 인근 마을과 숲을 무차별 폭격했다. 또한 자유사격지대로 선정한 지역에선 민간인이 총에 맞아 죽어도 얼마든지 적군 사살로 간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
다낭항에 미해병대가 상륙한 이후 미국은 남베트남 전역에 정규군대를 파병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제1 기병사단과 같이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최신식 기동성을 겸비한 군대 또한 남베트남에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 미군 제1 기병사단은 중부고원 지대 자라이 성에서 작전을 펼치다가 북베트남 정규군과 베트콩하고 교전을 벌이게 되는데 그게 바로 이아드랑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18000발의 포격이 있었고, 무장한 UH-1 헬기는 3000발 이상의 로켓탄을 쏘았으며, 심지어 B-52 폭격기까지 동원되었다. 이아드랑 전투에서 대규모의 헬기와 항공기 공중지원을 받았던 미군은 300명의 전사자가 속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1700명 이상을 사살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1965년 11월 미국은 이아드랑 전투에서 대규모의 헬기부대를 동원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만, 그렇다 해서 전쟁 자체를 승리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 전투에서 사상자만 보고 놓았을 때, 미군이 승리로 보일 수 있겠지만, 1965년 11월 18일 북베트남군은 다른 대대를 매복시켜 LZ Albany 지역에 있던 미군을 섬멸시켜, 미군 155명이 전사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아무튼 이아드랑 전투를 시작으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나는 전투에서 사실상 승리를 거둔다.
20세기 미국이 치렀던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과는 달리 베트남 전쟁은 정규전이 아닌 비정규전이었다. 즉 제2차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과는 달리 전선이라는게 없었다. 물론 막강한 화력을 소유한 미국이었기에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크게 착각했다. 총 사령관이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임기기간동안 300여개의 군사작전을 펼쳤다. 작전의 이름도 가지각색이었는데, 광(Starlight), 은검(Silver Bayonet), 분쇄-흰 날개(Masher-White Wing), 쌍독수리(Double Eagle), 용화(Dragon Fire), 맥아더, 셰넌도어(Shenandoah) 새러토가(Saratoga), 그리고 나폴레옹이라는 이름까지 동원되었다. 주월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베트남에 투입된 제1기병사단은 소련군 2.5개 사단과 중국군 6개 사단을 합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15]고 큰소리를 쳤지만, 이들 또한 전선없는 전쟁의 수렁에 빨려들어갔다.
전쟁이 격화 될수록 남베트남 주둔 미군의 숫자도 늘었는데, 1964년에 1만 7000명이었던 미군 병력은 1965년에는 16만 명을 넘어섰고, 1966년에는 45만 명, 1967년에는 49만 7천 명, 그리고 1968년에는 거의 54만 9000 명까지 증가했다.[16] 또한 미국의 그린 베레와 MAC-V 그리고 MIKE 포스 같은 특수부대와 그 밑에서 활동하는 일부 소수민족 군대가 미국편에 서서 싸웠지만, 어디까지나 특수부대였고, 전선의 진전을 가지고 오진 못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에 주둔했던 미군은 12개우러 단위로 교체되는 수준이었다. 그 때문인지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베트콩들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고, 총 병력이 50만을 돌파했던 시점에도 전체 병력의 25% 정도만 전투 현장에 배치되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전투만 보자면 베트콩들이 미군에게 밀렸다. 미군은 C-130과 같은 지상 화력 지원이 가능한 항공기들 부터 항공모함, UH-1 헬기 등 최신식 무기를 전쟁에 동원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는 미군이 아무리 폭격을 퍼부어도 큰 타격이 없었다. 미국은 1965년부터 1971년까지 대략 6년간 200만 톤 이상이나 되는 폭탄을 호치민 루트 전역에 투하했었는데, 투하한 폭탄량에 비해 전술적인 성과가 별로 없었다. 심지어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은 호치민 루트에 있는 거점 캠프에선 자급자족 형태로 농장까지 만들어 이용했다. 그 거점 캠프에서 자급자족 형태로 식물을 재배하기도 했고, 돼지나 닭 오리를 기르기도 했다. 거기다 미국은 호치민루트 폭격 도중에 피격으로 500대의 전투기를 잃었는데, 이는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이 잃은 항공기의 1/7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이와 별개로 중국과 소련은 북베트남에게 매년 10억 달러가 넘는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했다. 그 덕분에 북베트남군은 소련제 샘-2 미사일을 호치민루트에 배치할 수 있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생각보다 미군의 전사자도 적잖게 속출했는데, 1967년 12월까지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이 대략 2만 명이 넘어갔다. 1967년 10월 대략 20일 동안 콘툼 성 근처에서 벌어졌던 닥토 전투에서 361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40대 이상의 헬기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지상포화로 파괴되었으며, 미군의 최신식 항공기 록히드 C-130 허큘리스 두 대도 파괴되었다. 1967년 대략 2만 명 이상의 미군의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이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넘어갔다. 그러나 린든 존슨 정부가 항상 선전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초기 개입 당시만 해도 남베트남의 국토 75%를 베트콩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거짓말로 국민을 더 이상 속일 수 없었다. 1968년이 되면서 미국의 거짓말과 위선이 드러나게 됐고, 또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구정 공세
1967년 북베트남의 제2인자이던 레주언(Le Duan)을 비롯한 지도층들은 베트남의 대명절 구정을 틈타 대규모 봉기를 계획했었다. 그들은 호치민 루트를 통해 상당수의 병력과 물자를 남베트남에 보냈고, 남베트남에 있던 베트콩들은 남베트남 전역에 침투하여 베트남 대명절인 구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정 공세 이전 1만 5,000명 내지 2만 명 규모의 북베트남 정예군 325사단과 304사다니 호치민루트를 따라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 확인 되었는데, 304사단은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사단이었다. 1968년 1월 31일 대명절을 알리는 불꽃놀이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세가 시작되었다. 구정 공세 초기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공격했던 베트콩의 자살특공대와 공병대는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미대사관 1층을 7시간 동안 점령했고, 사이공 시내에서 약 2주 동안 전투가 지속되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휴양도시인 베트남 황궁이 있는 후에를 점령하고, DMZ와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케산을 포위하여 제2의 디엔비엔푸를 연상시켰다.
남베트남에 주둔하던 50만 명의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기습공격을 받았기에 아주 잠깐 동안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게 밀렸다. 그러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기대와는 달리 남베트남 민중의 내부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응우옌 반 티에우 정권 또한 무너지지 않았다. 시가지에서의 전투가 지속됨에 따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막강한 화력을 가진 미군에게 밀렸고, 1달간의 전투 동안 미국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포함하여 많은 도시들이 대부분 몇 주안에 전투가 종결되었지만, 옛 황궁이 있는 후에의 경우 대략 1달간 교전이 벌어졌다. 구정 공세 1달 기간 동안 공격을 게시했던 베트콩은 37,000명이 전사했던 데에 비해 미군은 2,5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케산 포위전만 보더라도 베트콩은 1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구정 공세에 승리한 미국은 또 다른 전쟁에 휩싸인다. 바로 자국 내에서 일어나는 반전운동이다. 결국 통킹만 사건을 일으켰던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반전여론에 휩싸이며 재선에 실패하고, 공화당의 후보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폭격도 1968년 11월 잠시나마 중단되었다.
반전 운동
베트남전 반전 운동은 대학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1965년 부터 일어났었다. 하워드 진이나 노엄 촘스키 같은 지식인들이 대다수였다. 따라서 1965년에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었다. 베트남 전쟁 관련 반전운동은 1965년에 있었는데, 당시 첫 집회 규모는 3만 명 정도였다. 1965년 당시 버클리 대학에서 베트남 전쟁 관련하여 합동토론회가 2일 동안 진행되었는데, 노먼 메일러(N.Mailer), 아이작 도이처(I.Deutsher)[17], 벤저민 스포크(B.Spock)박사 등이 연사로 등장하여 반전운동에 대한 열띤 강연을 펼쳤고 1만 2,000명의 학생들이 이를 경청하기도 했었다. 즉 베트남 전쟁 개전 초기에는 대학가에서 작은 규모로 일어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침략으로 베트남 전쟁이 격화될수록 이 반전운동은 규모가 커졌고, 1968년 구정 공세가 미국 전역에 방송됨에 따라 전 대중적인 투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따라 1970년에는 전국에서 거의 500만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반전 운동은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과 더불어 같이 진행되었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1960년대 미국은 징병제도였다. 미국의 징병제도로 인하여 가난한 백인의 자식들과 노동계급의 자식들 그리고 흑인의 자식들은 지옥의 베트남으로 가게 됐지만 대학을 다니는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 엘리트 계층들은 학업을 핑계로 징병을 언제든지 피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베트남으로간 흑인군인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주둔 미군의 총 병력 13%를 흑인이 차지고 이는 미국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과 비슷한 수치였다. 즉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미국 징병제도는 계급과 빈부 그리고 인종간의 불평등이라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반전운동이 일어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흑인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인 마틴 루터 킹 또한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의 죽음은 1968년 구정공세의 충격과 더불어 많은이들에게 반전운동에 동참하게 했다. 반전운동은 68혁명과 여성운동 그리고 흑인인권운동이 결합된 형태였다. 반전운동을 대하는 미국정부의 방식은 생각보다 무자비하고 거칠었다. 시위대가 반전운동을 하면 거리에 있는 미국의 경찰들은 곤봉을 돌고 시위대를 서슴없이 후려치기까지 했고 반전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소화기와 물대포가 동원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는 주방위군을 동원하기 까지 했다. 반전운동을 대하는 미국정부의 태도가 무자비했다는 사실은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 | 경찰은 호텔 입구를 장악하고 호텔 주위에 모여 있는 기자와 일반인들에게 까지 곤봉을 휘둘렀다. 경찰은 이미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유진 매카시의 선거대책사무실이 있는 15층까지 쳐들어갔다. 매카시는 사무실 직원 40여 명이 25명의 경찰관에게 둘러싸여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전쟁포로를 보는 것 같았다’는 매카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경찰에게 책임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나치스 돌격대 같았다.” | “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399 |
심지어 1970년 미국의 오하이오 켄트주립대학교에서는 반전성향이 강한 학생들이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였는데 주방위군이 발포하여 4명이 죽고 9명이 다치는 일도 있었다. 실제로 1968년 선거에 나왔던 유진 매카시는 시위대를 진압하러 온 경찰이 자신의 선거대책사무실이 있는 15층까지 쳐들어가 사무실 직원 40명이 경찰관들에게 둘려싸여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무자비한 진압을 하는 경찰을 나치 돌격대라 비유하기도 했다. 당연히 시워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주방위군이 발포하기 전까지 실탄을 장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거기다 현장에서 사망한 4명의 학생 중 2명은 남성이었고, 또 다른 2명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ROTC 장학생이었다. 오하이오 켄트주립대학교에서 이런 사건이 있자, 닉슨 정부는 당연히 반발여론에 휩싸였다. 이 사건 이후 448개의 학교가 폐쇄되었고, 16개 주에서 주방위군이 동원되었었다. 당시 오하이오 켄트주립대학교 사건을 들었던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존 머스그레이브는 PBS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기도 했다.
“ | 저는 켄트 주립대에서 애들이 죽었을 때가 기억납니다. 그때 그랬죠. “이런, 이젠 애들까지 죽이는구나! 정말 미쳤군!” 전 그때부터 다른사람과의 접촉을 피했어요. 어떤 운동에도 가담하지 않았죠. 그저 술만 마셨어요. 그러다가 생각난 게 있었어요. 미국은 이제 잠에서 깨어나야 해! | “ |
- PBS 베트남 전쟁 8화 |
1970년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교 사건과 더불어 미국의 반전여론을 불붙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였다. 이 펜타곤 페이퍼에는 그 동안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과정이 아주 상세히 서술되어 있었는데, 1964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통킹만 사건이 사실은 미국 측의 조작이었다.
1972년에는 미국의 유명한 배우인 헨리 폰다의 딸이자, 사회운동가인 제인 폰다(Jane Fonda)가 하노이를 방문하여 놀라게 했던 적이 있다. 그녀는 방송에서 "베트남 전쟁은 미제국주의가 일으킨 잔인한 전쟁인 것과 제국주의자 닉슨은 자존심 때문에 철수하기를 회피하고 있다"라고 하며 미제국주의에 대한 아주 날카롭고 사실에 기반한 비판을 했다.
당연히 미국의 극우 세력들과 베트남 전쟁 찬양 세력들은 그녀를 매우 싫어하지만 사실 그녀가 방송에서 발언했던 것은 전혀 틀린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닉슨 정부는 철수를 회피하기 위해 1970년에는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1971년에는 라오스를 침공했었다. 그외에도 많은 반전 운동가들이 베트남 전쟁 시기 북베트남을 방문했었다. 미국민중사의 저자로 유명한 하워드 진(Howard Zinn)도 그러했다. 구정 공세 이후 하노이를 방문한 하워드 진은 자신의 저서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베트남에서의 폭격 경험담을 얘기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수로 근무하며 했던 폭격에 대해 피해자의 입장에서 더더욱 생각해 보게 되었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반전운동의 주 핵심 세력은 1950년대 미국의 비트족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 히피들이었다. 히피들은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와 더불어 여러가지 투쟁들을 전개했었다. 남녀평등, 인종 차별 철폐, 제국주의 반대 투쟁, 프리 섹스 운동, 성소수자 권리 투쟁등이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전개하던 히피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이 전개했던 투쟁들이었다. 이들은 마리화나 같은 마약을 하고, 너덜너덜한 청바지와 엉킨 장발 패션 차림으로 떠돌아 다녔다. 1969년 이들은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을 개최함으로써, 자신들 만의 세계와 정서적 위안을 찾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 반전 운동은 1968년 당시 세계적으로 일어난 소위 68혁명과 맥을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호! 호! 호치민! 체! 체! 체게바라!"와 같은 구호를 외쳤던 서방의 젊은이들이 그러하다. 이런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은 비단 전쟁을 치르던 당사자인 미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그리고 일본에서도 베트남 전쟁을 규탄하는 집회가 있었다. 따라서 이런맥락에서 볼 때 베트남 전쟁은 국제적인 반전운동이 있었기에 미제국주의가 전쟁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통일
1969년부터 전투가 지속되면서 북베트남을 향한 미군의 폭격도 재개되었지만 이때부터 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북베트남에 대한 미 공군의 정찰 비행이 1968년 11월에는 600회였으나, 1969년 4월에는 800회로, 5월에는 1,300회로, 8월에는 1,450회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에도 북베트남은 굴복하지 않았다. 북베트남은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호치민 주석이 사망한 이후 더욱더 단결하는 모습을 보였고, 폭격이 심해지면 농민들의 자율권은 오히려 확대됨으로써 융단폭격이라는 미제국의 야만적인 학살극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하노이는 여러 가지 제한 조치를 풀고 농민들이 농지를 직접 경작하게 하여 할당제 이상은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허영했다. 이러한 하노이의 농업정책으로 식량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농촌이 피난 온 도시 근로자들을 부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기의 배급제도는 재고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해서 하루 1인당 쌀 배급량은 1파운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 가서는 2배로 늘어났다. 공습 기간 중 옷감 배급은 한 사람당 5야드였으나. 남녀의 통일된 의복을 만들어 입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북베트남의 모든 공장이나 정부 기관의 노동자에서부터 공산당 정치위원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수당을 받았다. 월 10달러 정도였다. 큰 공장일 경우 생산 시스템을 50여 군데로 분산시켰기 때문에 어떤 산업체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90%의 공장 노동자들 역시 이런 식으로 배치됨에 따라 어린이들은 가까운 마을의 공동 탁아소에서 맡았고, 청년들은 지역 방어와 도로 보수를 책임지게 되었다.[18]
한편 미국의 닉슨 정부는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생각하면서도 베트남에서의 전투를 계속했다. 1969년 5월 10일부터 20일까지 전개된 햄버거힐 전투에선 미군 476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닉슨 정부는 베트남화 정책(Vietnamization)이라 하여, 단계적인 지상군 철수를 감행한다. 따라서 1969년 50만이던 군대가 점차 감축하여 1972년에는 10만 명 안팎으로 줄었다. 이 과정에서 닉슨 정부는 1970년에는 베트콩이 활동한다는 이유로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무차별 폭격으로 최소 40만 이상의 캄보디아인을 학살했다. 미국이 캄보디아를 침공했던 이유는 베트콩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호치민 루트 통로를 허용해준 노로돔 시아누크 왕을 권좌에서 내리기 위함이었다. 미국은 캄보이아의 친미적인 장군 론 놀(Ron Nol)를 내세워 정권을 잡도록 하면서 캄보디아 침공을 감행했다.
더 나아가 닉슨 정부는 람손 작전이라 하여 1971년에는 남베트남군을 앞세워 라오스를 침공했다. 람손 719 작전(Operation Lam Son 719)의 주된 목적은 라오스 내에 있는 호치민 루트의 주요 거점을 파괴하는 것이었지만, 실패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하면서 동시에 대규모 병력의 미군 철수도 이루어 졌고 북베트남과의 협상도 이루어 졌다. 즉 미국의 라오스 캄보디아 침공은 사실 미국이 협상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따내기 위해서 벌였던 협박이었다. 구정 공세가 있던 1968년 남베트남 주둔 미군의 숫자는 54만 9천 명에 육박했지만, 1969년에는 48만명, 1970년에는 28만명, 1971년에는 17만 5천 명으로 감소했다. 한국군 또한 1971년부터 1만 명씩 병력을 감축했다. 그리고 한국군은 전쟁에서 철수하기 전인 1972년 베트남 중부고원에 있는 안케고지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며, 1973년 3월에 철수를 마쳤다.
1972년 1월에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미군 7만 명을 추가로 철수시켜 6만 4,500명까지 감축한다"고 발표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미-소(혹은 중국의) 데탕트 분위기를 의식하여 대규모 공세인 부활절 공세를 감행했다. 대략 700대 이상의 전차 및 장갑차가 동원된 남베트남 전역에서의 공세였자만, 미국은 이를 막강한 공군력으로 대응하는 바람에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북베트남의 목적은 종전이 굳어지기 전에 보다 많은 수의 병력을 남베트남에 진군시켜 유지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고, 부활절 공세는 이 점에선 성공적이었다. 부활절 공세가 있자 미국은 1972년 5월부터 북폭을 재개했고, 이른바 전략폭격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파괴를 자행했다. 이 작전에서만 1만 5,000대의 항공기가 참여해 6만톤의 폭탄을 투하했으며, 하이퐁항 등의 북베트남 항만을 어뢰로 봉쇄했다.[19] 이후 미국은 마지막 협박으로 1972년 11월에서 12월 북베트남에다가 대규모의 폭격을 감행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북베트남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물론 이 폭격을 통해서 미국이 얻은 것은 없었고, 결국 미국은 1973년 1월 파리 평화 조약을 맺고 베트남에서 완전히 발을 뺀다. 비록 미국이 완전 철수 하긴 했지만 군사고문단 50명 정도는 남겨두었고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은 계속 되었다. 이에 맞춰 한국군도 1973년 3월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1974년 12월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남베트남에 대한 총공격을 계획하게 되었다. 1975년 1월 북베트남군은 실험삼아 남베트남군이 있는 푹롱 성을 공격했고 3주 만에 점령했다. 그해 3월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을 향해 총 공세를 펼쳤고, 남베트남군의 주요 군사 거점지였던, 닥락성 부온마투옷을 점령했다. 남베트남의 중요거점인 부온마투옷에 대한 공격은 3월 10일에 개시되었는데, 불과 5일만에 함락시켰다. 부온마투옷을 함락시킨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매우 빠른 속도로 다낭과 후에를 점령했다. 1975년 4월 당시 남베트남의 레민다오 장군은 쑤언록을 중심으로 10일 이상 전선을 방어선을 사수했지만, 오합지졸에 불과한 남베트남군은 무너졌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남베트남군을 붕괴시킨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975년 4월 30일 수도 사이공을 점령했다. 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끝이난다. 즉 베트남은 외세의 끈질긴 침략을 무찌르고 승리한 것이다. 사이공 점령 당시 베트콩 전차의 한 젊은 대원은 베트콩 깃발을 들고 대통령궁으로가 깃발을 올렸는데, 이 역사적인 장면은 서방의 언론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같은날 미국 대사관에 있던 11명의 미국 해병대원은 대사관의 성조기를 가지고 베트남을 떠났다. 이는 맨 처음 미군 정보장교 패티 소령이 베트남에 OSS 공작요원으로 파견되어 호치민을 만나 독립투쟁을 논한지 정확히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시점이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총 공세를 개시하던 당시 남베트남 정권에 부역하던 이들은 탈출하려했다. 이들 중에는 미군과 같이 철수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따라서 남베트남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미군 헬기에 타서 탈출하려는 이들의 모습도 텔레비젼과 사진을 통해 서방에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전사자와 북베트남군 그리고 베트콩 전사자의 수치를 들어 베트남 전쟁 시기 사실상 미국이 승리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이는 미군 전사자만 보고 하는 소리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전사자는 대략 5만 8천 명이고, 베트콩 및 북베트남군 전사자[20]가 100만이기는 하나, 당시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투하한 폭탄에 4배에 달하는 800만 톤을 베트남 전쟁에서 소모했고, 전쟁 과정에서 대략 800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를 잃었으며, 대략 5000대의 헬기와 3700대의 항공기를 전쟁에서 잃었다. 5~6대의 항공모함을 베트남 영해에 배치했던 적도 있었다. 즉 이러한 비율을 가지고 베트남 전쟁을 보았을 때, 미군의 손실 및 낭비 또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비교할 거 없이 절대로 적은 손실이었다고 할 수 없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책의 마지막 구절을 남겼다.
“ | “한 세기에 걸친 외국인의 지배가 그들을 연옥으로 몰아넣었고, 또 다른 한 세기의 전쟁이 그들을 질곡으로 이끌었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부활했다. 인류 역사는 베트남 민족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 재통일을 이룩한 것보다 더 위대한 본보기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 “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613 |
전후처리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며 통일전쟁이 끝나자, 사이공 점령 며칠 전 구성된 군사관리위원회가 법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어떤 저항세력의 연합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5월 15일 북베트남 주석 똔득탕 등이 참석한 사이공에서의 전승축하 기념식에서 남부해방군 그러니까 베트콩들은 금성홍기만을 들고 행진했다. 베트콩의 공식 조직인 남베트남공화국임시혁명정부는 북베트남측 정권으로 통합되었고, 이후 북베트남 지역에서 수천 명의 노동당 관리들이 남으로 내려와 행정·교육·산업 등 각 부문의 요직을 차지하여 직접 통치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여기에는 미국의 괴뢰정권인 남베트남에 부역하던 이들에 대한 청산과 재교육 프로그램도 있었다.
1975년 베트남이 통일 된 이후 베트남 또한 전후 처리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대략 100만 이상의 보트피플들이 발생했고, 100만 명 이상이 재교육을 받았다. 물론 말이 좋아 재교육이지 경우에 따라선 몇 년 이상 감옥생활을 하게되는 경우가 적잖게 있었다고 한다. 베트남 역사를 연구한 최병욱 교수의 '베트남 근현대사'에 따르면 이들 중 10만 명 이상이 가혹한 처사를 받았다. 그러나 책에서 지적하듯이 이들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관련 증언 대부분이 현재 미국이나 프랑스에 있는 보트피플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당시 베트남 공산당에 의해 일어난 전후 처리 과정에서 수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학살 당했고, 당시 남베트남에 맞서 싸웠던 베트콩들이 토사구팽식으로 숙청당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와 허구에 가깝다. 국내의 수구세력들은 이런 군대 정훈 교육에서나 나올법한 엉터리 거짓 선전을 액면 그대로 믿겠지만, 진실은 이와 다르다. 베트남 통일 이후 대규모의 학살은 없었고, 베트콩들의 경우 정치 경력에 있어서 북베트남 보다 덜 대우 받았던 것은 사실이나, 대량으로 숙청당하지는 않았고, 도이머이 정책 이후 베트콩 출신들 또한 베트남 공산당의 주요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베트남 전쟁이 공산주의측의 승리로 끝난 이후 외부의 관찰자들은 대규모 학살이 자행될지도 모른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규모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트남 역사를 전공한 최병욱 교수는 "이것만은 북베트남 점령군이 국제사회로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통일을 이룩한 북베트남측과 베트콩은 양측의 긴밀한 협조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들 정권 사이의 통합 형식을 빌려 통일을 이룩했다.
위에서 상술한 재교육의 경우 대부분 단기간에 풀려났다. 대부분의 하위직 공무원은 3일간의 집체교육과 반성문만으로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면제받았고, 일부 고위 공무원들은 장기간 구금되거나 일부 처형되는 경우였다. 베트남 전쟁 이후 감옥에 가장 길게 수용되는 경우 15년에서 최대 20년을 넘기지는 않았으며, 가혹처사를 받았던 이들도 대부분 10년 이내에 풀려났다. 대한민국의 경우 비전향 장기수가 보통은 20년, 최대 40년 이상을 감옥에서 복역했던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당시 재교육 프로그램은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잘했다곤 할 순 없어도 대체로 빨리 풀어준 편이다. 즉 대한민국 군대에서 보여주는 보트피플이니 월남패망이니 통일후 수백만이 학살 당했다니 뭐니하는 영상들은 조작과 날조 반공주의에 입각한 역사 왜곡의 산물이다. 그런 반공주의에 기반한 프로파간다용 영상들이 유튜브를 포함한 인터넷에 어떠한 팩트 체크도 없이 나돌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2002년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를 집필한 유인선 교수는 2018년 이 책의 개정판을 냈는데, 이 책에 나온 자료를 보면 앞에서 얘기한 통일 후 대규모 학살이나 숙청 등이 얼마나 과장되고 왜곡되었는지 알 수 있다. 책에 따르면 과거 사이공 정부의 공무원·군인·사업가 등 최소한 수만 명은 각지에 설치된 재교육수용소에 억류되어 지위에 따라 몇 주일 내진 몇 년을 보내야 했다고 한다. 통일된 지 10년 후인 1985년에는 수용소에 억류된 자의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21] 언론학을 전공한 유일상 교수는 <베트남 역사문화기행>이라는 책에서, 통일 베트남 정부는 대략 10만 명에 이르는 남베트남 정부 인사와 남베트남군 관계자들에게 당국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재교육 수용소에 보내져 계급 지위에 따라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년 이상을 지냈다고 썼다. 1992년 시점에서 9만 4,000명이 석방된 상태였고, 남은 6천 명만 재교육 수용소에 있었다고 한다.[22] 그러니까 수백만이 죽고, 수십만 혹은 수백만이 구금되었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한 것이다. 아래는 조너선 닐의 저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나오는 내용이다.
“ | 남베트남 군인들은 자신과 가족들에게 닥칠 일을 두려워했다. 군인들은 공산당이 자신들에게 잔인하게 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산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75년 3월 24일 남베트남 군대는 와해됐고 북측의 탱크가 사이공으로 진주해 들어왔다. 게릴라들은 미 투이 퐁의 대로를 공공연하게 행진했다. 그들은 정부군이 트럭을 타고 1번 고속도로를 따라 패주해 갈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손으로 써서 길에 내건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유혈 참사 없이 승리하다.” 과거에 베트민이었던 한 늙은 농민은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20년 동안 싸워왔다. 그리고 이제 며칠만 있으면 우리의 투쟁도 끝날 것이다.” |
“ |
- 조너선 닐, 정병선(역), 『미국의 베트남 전쟁』, 책갈피, 2004, p.245 |
내용을 정리하자면,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보트피플이나 재교육 과정은 분명 있었으나, 일부 반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대규모의 학살은 없었으며, 새간에 알려진 것들은 대부분 과장된 정치적 프로파간다다. 통일 베트남의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반공주의자들의 주장은 과거 베트남 전쟁 시기 남베트남에서 일어났던 정치 탄압과 강제 소개 그리고 민간인 구금 과정에서 벌어진 무수히 많은 전쟁범죄에 대해선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모순 점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 역사적 맥락 무시를 저지르는 반공주의자들의 왜곡된 시각에 기반한 것이다.
전쟁 범죄
미군의 전쟁범죄
“ | 몇 시간 만에 500명을 죽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그것은 꼭 가스실 같다. 히틀러가 했던 것 말이다. 여자,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50명씩 세워놓고, 그냥 쓸어 버리면 된다. 그렇게 했다. 25명, 50명, 100명씩 말이다. 그냥 죽였다. 그들을 모아놓고, 나와 동료 몇 명이 M-16 소총을 자동으로 한 다음 다 쏴 죽여 버렸다. | “ |
- 조너선 닐, 정병선(역), 『미국의 베트남 전쟁』, 책갈피, 2004, p.161 |
“ | 미라이 양민 학살 사건은 군부의 엄격한 통제로 1년간 철저히 은폐되었다가, 1969년에 기자들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사건이다.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로스 캘리 W.L Calley 중위는 소대원 30명을 이끌고 중부 꽝응아이 성의 한 마을에 진입하여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 약 500명을 무차별 살해했다. | “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487 |
“ | 농민들은 논에서 생계 유지를 위해 또 다른 투쟁을 해야만 했다. 전략촌이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집단농장의 형태로 변질되어 몇 명의 장성들이 봉건 영주들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도시로 통하는 도로는 세금과 전쟁을 피하기 위한 남베트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경작지가 황폐화되자 농민들에게는 쌀과 총이 동시에 지급되었다. 농민들은 최소한의 식량이라도 보장받기 위해 자식들을 전장에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매달 2000여 명의 농민들이 전장에서 죽었다. 비율로 따져보면 외국군 1명당 20명꼴이었다. 지방 관리들은 노인들에게 주는 최저생계비를 갈취했고, 이런비리가 들통나면 이를 감추기 위해 노인들을 죽이고 논바닥에 버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 “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253 |
“ | 베트콩과 민간인 사망자 수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없는 실정이다. 베트남 측의 추산치가 더 높기는 하지만 대개 150만~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수십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인도차이나에서 이 전쟁으로 약 3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들 가운데 대다수가 공습으로 사망했다. | “ |
- 조너선 닐, 정병선(역), 『미국의 베트남 전쟁』, 책갈피, 2004, p.105 |
“ | “미군은 공중 폭격을 할 때마다 모폭탄을 투하해서 대규모 파괴 효과를 노렸다. 모폭탄은 땅에 떨어지면서 폭발할 때 120개의 자폭탄으로 분리된다. 이 자폭탄이 폭발할 때는 엄청난 양의 파편이 인명 살상용으로 활용되었다. 결국 자폭탄에서 나오는 파편은 시설 구조물 파괴에는 전혀 효과가 없었고, 오로지 사람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 “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407 |
“ | “간단히 말해서 북베트남 인구의 1/3인 600만 명이 살았던 이 지역 도시들의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프랑스 점령 시대의 통계에 따르면, 어떤 도시는 30만 명이 거주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 “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437 |
“ | “미군은 구정 이후 휴전 캠페인을 가속화 했는데, 실제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농촌에 남았던 농민들을 제거하는 대량학살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당시 수십만 명의 인명이 사라졌고, 국토는 더욱 황폐해졌다. 결국 북베트남의 대부분 지역, 그중에서도 특히 남쪽 지역은 달의 표면처럼 변했다. 또한 북부 라오스의 농촌사회는 역사상 가장 무서운 규모의 포탄을 맞기도 했는데, 미국 정부는 이 폭격과 남베트남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은 아무 관련이 없음을 인정했다. 미국은 이어서 캄보디아를 침공했는데, 폭격으로 생활터전이 파괴되어 격분한 농민들을 결집하여 주변 세력이었던 크메루루주에 동참했다. 전쟁 말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총 사망자 수가 400만 명 이상에 달했고, 국토와 사회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 “ |
-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 정경옥(역),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315 |
“ | 베트남 전쟁에서는 총 500만 명이 사망했다. 5만8000여명은 미군이었다. 나머지는 베트남인으로, 100만 명 정도는 군인이었으나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 사망자 대부분은 폭격으로 죽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국은 베트남 국민 전체를 적으로 놓고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쉽고 안전하게 적을 사살할 수 있는 방법은 공중 폭격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여겼던 것이다. | “ |
- 닐 포크너, 이윤정(역), 『좌파 세계사』, 엑스오북스, 2016, p.654 |
미군은 건국당시부터 미국 원주민들을 학살하면서 성장한 범죄적 조직이다. 미국 백인들은 건국시부터 타인종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 밖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는 늘 학살을 저지르곤 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필리핀인들은 미국을 도와 스페인을 필리핀에서 추방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미국은 곧 야욕을 드러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다. 미군은 이에 항의하는 필리핀인들을 학살했고, 기근이나 그밖의 다른 재해가 겹치기는 했지만, 이후 100만명 가량의 필리핀인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도 이런 미군의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아서, 스미스 대대가 인민군에게 패전하자 분풀이로 피난민 수백명을 학살한 노근리 학살이 있다. 미군 당국은 노근리에서 학살 명령을 부인했고, 후에 학살명령이 있었다고 증언한 참전군인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며 입을 막았다.
10여년후 벌어진 베트남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지만, 전선이 없는 비정규전이었던 만큼 한국전쟁보다도 더 참혹했다. 1971년 열린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오즈번은 피닉스 작전에 대해 증언했다. 캐나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군이 전개한 피닉스 전략을 통해서 1968년 부터 1971년 까지 약 2만7천명을 체포하여 2만명을 어떠한 물증이나 근거도 없이 학살했다고 한다.[23] 피닉스 작전으로 인한 사망자가 2만 명이라는 것은 가장 적게잡은 수치이고, 많게는 4만 명까지 잡기도 한다. 이 작전에는 미 해군 특수부대인 네이비 씰(Navy Seal)과 그린베레(Green Beret)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의 특수부대들이 참여 했고, 그리고 남베트남 비밀 경찰들이 참가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을 납치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성고문, 전기고문, 거꾸로 매단 상태에서 행하는 물고문 그리고 무차별 구타와 같은 잔혹한 고문들을 자행했다고 한다. 오즈번은 "피닉스 작전은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가장 야수적인 범죄"였다고 털어놓았고, 6인치 나사못으로 뇌를 관통 당해 사망한 시신을 자신이 직접 확인했다고도 증언했다. 확실한 물증없이 사살된 사람들 대다수는 고문으로 죽거나 산 채로 헬기에 실려 태평양에 던져졌다고 한다. 즉 미군은 구정 공세 이후 피닉스 작전을 통해 계획적으로 전쟁범죄를 범한 것이다.
1970년 봄 사이공 농과대학에 다니던 남녀 학생 11명이 반정부시위와 관련하여 가혹한 고문을 받은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70년 7월 인권유린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맥클로스키 등을 포함한 미 하원의원 4명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이를 확인해보는 일까지 있었다. 심지어 베트남 수용시설 조사단에 참가했던 호킨스 하원의원은 북베트남 미군포로 수용시설이 남베트남의 미군 관활 수용시설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라며 미군의 범죄행위를 규탄하기도 했다.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피해를 보자 화가 난 미군들은 죄없는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68년에 일어난 미군 최악의 학살인 미라이 학살이다.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가 이끄는 미군은 미라이 촌에 들어가 단 하루 동안 총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미라이 학살 당시 미군에게 학살 당한 504명 중 17명이 임산부와 173명의 어린이 그리고 5개월 미만의 유아 56명이었다.[24] 이 학살은 1969년 어느 양심있는 기자의 폭로로 인하여 진상이 규명됐다. 미라이 학살은 당시 학살을 저지른 찰리 부대가 상급 부대에 공식보고한 전황에는 적 128 사살 아군 1명 부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라이 학살이 보여주듯이 제국주의자들의 학살은 얼마든지 은폐될 수 있었다. 즉 미라이 학살은 미군이 베트남 곳곳에서 체계적인 양민 학살 가운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라이 사건을 은폐한 죄목으로 기소당한 오렌 핸더슨 대령은 1971년 초 기자들에게 여단 정도 크기의 모든 미군 부대는 어딘가에 각자의 미라이를 숨겨두고 있다고 고백했었다.[25] 또한 미국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닉 터스(Nick Turse)는 2013년에 출간한 자신의 책 『Kill Anything That Moves: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이라는 책에서 미라이 학살 사건 외에도 최소 100건 혹은 그 이상의 학살 사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규모는 다를 지라도 그러한 학살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는 얘기다. 당시 미라이 학살을 주도했던 사람들 중 윌리엄 캘리 중위만이 처벌을 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가, 닉슨 정부에 의해 가택연금 3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미라이 학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으면 진보위키에 있는 미라이 학살 문서를 참고하라. 그외에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타이거 부대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가 있다. 1965년 말에 창설된 타이거 부대는 1967년부터 베트남의 꽝응아이성에서 무고한 민간인 에게 베트콩이라는 혐의를 씌워 고문 및 살해하고, 생업에 전념하는 오지 마을을 습격하여 어린이 부녀자 노약자 등 주민을 학살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젊은 부녀자를 강간한 뒤 살해하고, 희생자의 고환을 잘라 전리품으로 들고 다니는가 하면, 부녀자의 품에 있던 유아의 목을 베거나 군홧발로 밟아 죽였고 한다. 타이거 부대의 전쟁범죄 행위는 PBS 베트남 전쟁에서도 언급된 사안이다.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보자.
“ | 방송인: 스타우드 씨, 베트남엔 언제부터 언제까지 계셨죠?
스타우드: 저는 베트남에 1966년 9월부터 1967년 9월까지 1년 동안 있었습니다. 방송인: 어느 부대에 있었죠? 스타우드: 제101공수사단 제1여단입니다. 방송인: 베트남에 계실 때, 미군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직접 목격하신 적이 있나요? 스타우드: 네, 있습니다. 스타우드: 이 잔혹행위들은 제가 육군 신문 기자로 배정된 부대의 병사들이 짓입니다. 스타우드: 한 베트남 소녀를 강간하고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심문 때문에 구금된 소녀가 이틀 동안 겁탈당하고 나서, 사흘째 오전에 살해된 사건이었죠. 방송인: 한 명 이상이 겁탈한 건가요? 스타우드: 네, 위생병과 저 그리고 소대원 한 명을 빼고는 모두 가담했어요. 방송인: 당신은 반대했고, 그들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습니까? 스타우드: 네, 강간 사건 이후에 해당 대대의 원사에게 항의했더니, 그의 대변은 이런 일은 전쟁에서 흔히 일어나는 거라면서 입 다물라고 하더군요.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군목한테 가서 그 얘기를 했더니, 군목이 자체 조사를 했고, 사실이라는 게 밝혀져서 같이 주임 원사한테 갔더니, 그가 군목에겐 종교 일에나 신경 쓰라고 하면서, 돌려보냈고, 저한테는 입 다물라고 하면서 다음 임무에서 돌아올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
“ |
- PBS The Vietnam War 2017 5화 |
미국은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호치민 루트, 라오스, 캄보디아 그리고 남베트남의 밀림을 무차별 폭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남베트남 숲에 에이전트 오렌지를 비롯한 각종 고엽제를 살포하여 수백만의 민간인들을 죽이고 테러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사망자가 2백만 이상이 나온 것은 사실 미국의 무차별 폭격과 고엽제 투하가 큰 원인이다. 1961년 8월 초부터 1971년 10월 말까지 만 10년 동안 미국은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에 총 7300만 리터의 맹독성 고엽제를 살포했다. 주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는 고엽제였는데, 베트남 인민 1인당 2.7kg에 달하는 달하는 다이옥신을 퍼부은 셈이었다. 고엽제로 인한 피해는 미군과 한국군 등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그 피해자는 참전 장병 및 그 자녀들을 포함하여 수십만에 이른다. 남베트남에서 미국은 전체 1만 5000개 촌락 가운데 9000개를 파괴했다. 북베트남에서은 산업도시 6곳 모두가 완전히 초토화됐다.[26] 남베트남에서 미군은 소위 수색과 섬멸 작전을 전개하면서 이러한 짓거리를 밥먹듯이 했고, 당연히 이러한 과정에서는 극심한 민간인 사살과 피해를 불러왔다.베트남에서 침략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후일 아메리칸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연하는 자리에서 베트남인 380만 명이 사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학살한 정확한 숫자는 알기가 힘들다. 다만 많은 추정치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최소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70년 에드워드 허만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에 의해 최소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다.[27] 보통의 경우 베트남 전쟁의 민간인 사망자는 대략 남북베트남을 합쳐 200만 명으로 보고 있다.[28] 전쟁의 책임자인 로버트 맥나마라는 전쟁 기간 동안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죽었다고 밝혔으며, 이후 베트남과의 회담에서 미군의 북폭 기간 3년 동안 1년에 10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과거 그는 북폭 당시 1주일에 1,000명의 북베트남 민간인이 죽었다고 아주 낮게 추산했었는데, 그렇게 해서 18만 2,000명의 북베트남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보기도 했었다.[29] 그러나, 롤링썬더 작전 당시 미국이 북베트남에 투하한 폭탄의 량과 인구 밀집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고려해보면, 상식적으로 너무 적게 잡은 수치라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의 피해를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주인공 역을 맡았던 영화감독 마틴 쉰은 <Vietnam: American Holocaust>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1995년 베트남에서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대략 100만 명의 군인과 400만 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베트남 측 추정치가 있으며, 따라서 500만 명이 미국의 침략으로 죽었다고 다큐멘터리에서 주장했다.[30] 1995년 베트남에서 공개한 그 문서에 따르면, 북베트남에서 200만 명 남베트남에서 2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데, 결과적으로 미국에 의해 400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만약 이 수치가 사실이라면, 북베트남에서 죽은 200만 명의 민간인은 미군 폭격으로 죽은 셈이 된다. 당시 남북베트남이 미군의 학살적인 폭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은 촘스키와 허만이 공동으로 쓴 저서 <여론조작>을 통해 알 수 있다.
“ | 남쪽에서는 1만 5,000개 마을 중 9,000개, 약 2,500만 에이커의 농지, 1,200만 에이커의 삼림이 피해를 입거나 파괴되었다. 또한 150만 마리의 가축이 죽었고, 100만 명의 여자들이 남편을 잃었으며, 80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다. 북쪽에서는 전체 6개의 산업도시, 30개의 성 중에서 28개(12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116개의 도시 중 96개, 5,800개의 공동생활체 중 4,000개가 피해를 입었다. 40만 마리의 가축이 죽었고 100만 에이커 이상의 농지가 피해를 입었다. 땅이 대부분 달의 표면처럼 변했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방글라데시보다 적은 배급량으로 굶주림을 면치 못하며 살았다. 스웨덴의 평화연구소인 SIPRI는 이 같은 환경적인 영향을 검토한 뒤에 "그런 공격에 의한 생태계 약화가 길게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 “ |
-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 정경옥(역),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391~392 |
미군의 전과보고도 정말 문제가 많았다. 예를 들어, 1965년 8월 18일부터 24일까지 전개된 성광작전(Operation Starlite)의 일부인 Van Tuong 반도에서 미 해병대가 전개한 수색과 섬멸 작전(Search and Destroy)을 보면, 전과 보고에 따르면 688명의 베트콩 병사를 사살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노획한 무기는 109개였다. 또한 이 수색과 섬멸 작전 과정에서 Van Tuong 지역은 완벽히 초토화 되었고,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과 포격으로 부상당했다. 당시 이 작전에 참여한 미군 대대장은 "수많은 마을들이 심각하게 파괴되거나, 네이팜탄 폭격 및 함포사격으로 파괴되었다."고 얘기했을 정도다.[31] 이와 같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바로 미국은 이런 식의 군사작전을 무수히 많이 전개했고, 이 과정에서 당연히 무수히 많은 민간인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 공군으로 참전한 브라이언 윌슨(S Brian Wilson)씨의 경우 메콩강 삼각주에 있는 자유사격 지대에서 수행했던 폭격 임무와 그 결과에 대해, "비도덕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닉 터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또한 브라이언 윌슨씨는 터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작전에서 총 62명의 민간인의 시신을 토대로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를 보고 했고, 이 보고서에는 15명에서 25명의 여성과 수많은 어린이와 노인의 시신이 있다고 썼지만, 정작 나중에 읽은 미군 공식 기록에는 이 리스트가 130명의 베트콩 사살"로 되어있었다고 증언했다.[32] 이처럼, 베트콩과 민간인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군 전과 보고는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죽어도, 얼마든지 베트콩 사살로 허위보고하는 사례가 많았다. 따라서 이러한 미군의 전쟁범죄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일상적으로 수행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한국군의 전쟁범죄
“ | 미국인들보다 더 위험한 것은 미국인 관할을 순찰하던 한국인들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을 출신의 한 아이가 그들의 부대로 걸어 들어가 몸에 묶고 있던 베트콩 폭탄을 폭발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마을 아이들에게 끔찍하게 보복했다. 그 사건 이후에, 한국인 병사들이 학교로 가서 소년 몇 명을 끌고 나와 우물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본보기로 삼기 위해 그 속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이런 짓을 하는 한국인들이 마을 사람들 눈에는 프랑스인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따라다니면서 더 거칠고 비열하게 굴었던 모로코인들처럼 보였다. 2차 대전 때의 일본인들처럼, 한국인에게는 양심이 전혀 없어 보였고, 무자비한 살인기계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나라를 지저분한 거래를 할 수 있는 딱 알맞은 장소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 “ |
- 비엣 타인 응우옌, 부희령(역),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더봄, 2019, p.198~199 |
“ | 한국군의 학살은 새벽 1시경에 이루어졌지요. 그들은 이곳의 주민들 전체를 모두 한곳에 모아 놓고, 폭탄을 터뜨리고 총을 쏘아 죽였지요. 모두 105명이 죽었지요. 그중에 내 자식들도 세 명이 있었습니다. 학살 당시 나도 입에 파편을 맞아 지금 이렇게 입이 돌아갔습니다. 나에게는 모두 네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전쟁 통에 모두 잃었습니다. | “ |
-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푸른역사, 2011, p.150 |
“ | 베트콩이 나타나면 마을을 몰살시켰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 며느리 다 죽여버렸어. 싹 쓸어버렸어. 그러니 베트콩이 우리를 손댈 수가 없어. 그때는 잔혹 행위 같은 걸 우리가 자행을 했어요. | “ |
- 박태균, 『베트남 전쟁』, 한겨례출판, 2015, p.100~101 |
“ | 그랬을 것이다. 어린 꼬마조차 사탕을 받아들고는 뒤돌아서 수류탄을 던지고 달아나는 일도 있었다하니 모든 민간인이 베트콩으로 보였을 것이다. 전선이 없는 전쟁, 민간인과 베트콩이 구분이 안 되는 유격전쟁, 낯선 베트남의 정글에 내던져진 한국군 병사들의 혼란과 공포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논리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전선이 없는 전쟁, 유격대와 민간인이 구분이 되지 않는 전쟁은 우리의 근현대사 속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1894년의 농민전쟁, 의병운동,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운동,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빨치산운동 등도 모두 전선이 따로 없었고, 유격대와 민간인의 복장이 구분되지 않는 전쟁이었다. | “ |
- 한홍구, 『대한민국사 2』, 한겨례출판, 2003, p.29 |
“ | 집을 샅샅이 뒤져라! 움직이는 물체는 무조건 쏴!!. | “ |
- 드라마 머나먼 쏭바강 1화 |
위에 상술된 인용문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낸 한국군 또한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 6.25의 개전책임이 조선인민군에게 있는 것과는 별개로 한국군은 양민학살을 숱하게 저질렀고, 이는 반공적인 분위기 하에서 "조선인민군의 만행"으로 둔갑했지만, 워낙 벌여놓은 학살극이 많다보니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정부도 마지못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은 제주 4.3 항쟁과 여순 항쟁에서 보듯이 6.25이전부터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을 벌여왔다. 이들 사건에서 단순히 좌익 반란군만 진압한 것이 아니라, 반란군이 점령했던 마을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만행을 숱하게 저질렀다. 이는 군사정권하에서는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입막음으로 보도가 안되거나 좌익이 한 것으로 왜곡되다가 199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공론화될 수 있었으며, 진상조사도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서 하게 됐다. 창군시점에서 한국군 수뇌부는 다수가 양민학살을 밥먹듯이 하던 일본군-만주군, 여기에 소수의 광복군 출신들조차 양민학살면에서는 일본군과 하등 나을바 없는 장개석의 국민당군 출신이었으며 이들에게 직접 교육받은 다음세대 지휘부가 참전한 베트남 전쟁에서 학살과 무관할리 만무했다. 당장 주월한국군총사령관인 채명신부터가 제주 4.3 사건 진압군으로써 경력을 쌓은 인물이며,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과 하나회 군부들 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경력을 쌓았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의 학살만행은 1980년 광주항쟁에서 한국군의 잔혹함으로 다시 반복된 셈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로 공론화된 그 대표적인 예가 1968년에 있었던 퐁니 퐁넛 학살이다. 1968년 2월 12일 한국의 청룡부대가 저질렀던 퐁니 퐁넛 학살로 인하여 74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다낭에서 13km 정도 떨어진 이 마을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그대로 있다. 빈호아나 고자이 하미 마을을 비롯한 곳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현재도 있다. 1966년 12월 초 꽝응아이성 빈호아 마을에선 대략 430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집단 학살 당했다. 이외에도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총 5개 성에서 9,000여 명이 사망했고, 꽝남, 꽝응아이 그리고 빈딘성에서 학살이 벌여졌고, 꽝남성에서만 4,000여 명이 죽었다. 마닐라에서 한인교회 목사로 살고 있는 한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의 체험담에 따르면 당시 백마부대 병사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작전을 나갔다가 귀대하는 길에 대여섯 살 난 아이가 혼자서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한 청룡 부대원이 다가와 "이 아이도 베트콩의 새끼니 죽여야 한다"라고 하여 시비가 일어났었다고 한다. 이 청룡부대원은 그 사람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는 만약 아이를 내주지 않으면 너도 함께 죽이겠다며 방아쇠를 당기려 하여 그 순간 위험을 직감한 동료 부대원이 아이를 청룡 부대원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 사람의 눈앞에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발의 총을 맞고 죽었다면서 우울해하던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고 한다.[33] 나무위키를 비롯한 극우파 일베세력들은 이를 애써 부정하려하고, 한국군을 정의로운 군대로 묘사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들이 그리도 사모하는 한국군들은 정의로운 집단이 절대 아니었다. 한국전쟁 시기 국민보도연맹으로 자국민을 수십만이나 학살했던 전력이 있고, 광주에서 수천명을 학살했던 군대다. 그런 군대가 반공으로 무장했음에도 게릴라를 토벌하는 작전에서 학살이 없었을 것이라 보는 것은 분명 관점에 문제가 있다. 나무위키를 비롯한 극우세력들은 미라이 학살을 예시로 들며, 한국군의 학살이 공론화 되지 않은 점에 굉장히 많이 주목하는데, 미라이 학살 또한 군부에서 철저히 은폐하려 했던 사건이다. 심지어 한국군의 규모를 이유로 들어 대규모의 학살의 불가능하다는 식의 서술도 있는데, 그들이 그리도 강조하는 미라이 학살만 보더라도 26명의 미군이 504명을 학살했었다. 베트남 파병 당시 한국 정규부대가 참전했고, 연 5만 명 이상이나 참전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런식의 숫자 비교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그리고 나무위키 같은데에선 절대 언급치 않는 이야기지만, 소위 대한민국 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의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더한 야비한 새끼들 (번역 왜곡; 한국(군)이 일본 보다 더 잔인하다가 맞음{(brutal bastards, worse than Japanese)"이라고 폄하했다.[34] 쉽게 말해 정의의 십자군이니 월남전에서 효율적으로 잘 싸웠다니 하는 얘기는 유치뽕짝 반공주의적 상상력에 가깝다.
나무위키와 극우 세력들이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할 때, 예로드는 사건이 있다. 1966년 맹호부대에 의해 했다고 알려진 고자이 학살이 그러하다. 특히 그들은 현재 고자이 학살 증오비에 그려진 벽화에 그려진 그림을 들며 "그 벽화에 그려진 한국군은 맹호부대가 아니라 남베트남군 레인저 부대다."라는 비공식적인 결론을 내린다. 즉 그들은 고자이 학살의 학살 주체가 한국군이 아닌 남베트남군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고자이 마을 학살 벽화에 있는 소위 맹호부대로 표현된 병사의 군복 문양을 보면 남베트남군의 레인저 부대와 유사하다. 그러나 그 따위 추측이 절대적인 진실일 수는 없고, 극우 세력 자신들 만의 상상력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기준으로 보았을 때, 2022년 서방과 우크라이나가 조작한 부차 학살 이후 발견된 시신들 중에는 친러주의자를 의미하는 흰색 천을 많이 두르고 있었는데, 고자이 학살에 대해 주작을 운운하는 이들은 정작 우크라이나의 이런 거짓말에 대해선 1도 의심안하며, 대뇌망상을 퍼뜨리고 있다.
무엇보다 고자이 학살 피해자들은 한국군이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또한 학살을 당했던 피해자들이 부대 마크를 정확히 기억하기는 힘든 일이다. 따라서 고자이 학살을 베트남 정부나 다른 곳에서 남베트남군이 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피해자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기에 남베트남의 레인저 부대가 했다고 하는 것은 한국군 학살 피해자들의 대다수 주장을 부정하는 행위다. 나무위키와 일베 그리고 수구 꼴통들은 절대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겠지만, 고자이 학살에 대해 반성하는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가 있다. 선교사인 이우석씨가 그러하다. 맹호부대로 참전했던 이우석씨는 빈딘성에서 피해자들을 돕는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35]
고자이 학살이 한국군과 군사작전상으로 연관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고자이 학살이 일어나던 시기는 1966년 주월미군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가 빈딘성 지역에 2만 명의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으로 구성된 부대를 보내 6주간 전반적으로 수색과 섬멸(Search and Destroy) 작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즉, 한국군은 이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벌였다. 심지어 주월한국군사령관인 채명신 또한 회고록인 <베트남 전쟁과 나>에서 "작전 기간 중 전과는 적 사살 92명, 포로 33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소총은 불과 4정 노획으로 그쳐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무기가 너무 없다면 사살자의 일부가 양민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이다."[36]라고 언급했다. 이 말은 즉 베트콩과 민간인의 구분이 없는 상황이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사례는 위의 "미군의 전쟁범죄"라는 문단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즉, 한국군도 이런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고자이 학살 당시 한국군이 그 지역에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 처럼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나무위키가 "베트콩의 조작"이라고 단정하는 '린선사 사건'의 경우 베트콩의 조작이라 1969년에 보도했던 기레기 언론인 동아일보의 기사와 한겨레 21에서 린선사 사건 증인이 쓴 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무위키 반공주의자들은 자신들 멋대로 베트콩의 조작이라고 지껄이고 있다. 나무위키를 비롯하여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몇몇 반공주의자들의 행위는 마치 제주4.3 학살이나 국민보도연맹 학살 그리고 광주학살을 부정하는 태극기 부대나 고엽제 전우회의 논리 혹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난징 대학살 징용 문제 일본 제국주의 침략문제를 전면 부정하는 일본 극우 세력들과 하등 다를게 없는 짓이다. 즉 나무위키에서 보이는 그런 식의 논리가 과거 제주 4.3 학살과 국민보도연맹 학살 그리고 5.18 광주 학살을 지배세력들이 합리화 시키기 위해 썻던 극악무도한 논리일 뿐이다. 추가적으로 얘기하자면 나무위키 같은 곳에선 절대 언급치 않은 사실이지만, 베트남인들은 대체로 한국군을 부정적으로 기억한다. 심지어 한국군의 동맹인 남베트인들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남베트남 공군 총사령관인 응우옌 까오 끼[37]가 한국 병사들을 부패와 암거래로 고발하기도 했었다.[38] 나무위키 같은 곳에선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 또 다른 사실을 얘기하자면, 하미 마을 학살을 기록한 하미 마을 증오비가 설립될 당시 마을 사람들은 한국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기를 원했지만 추모비를 세우는 데 돈을 지불한 한국의 퇴역 군인들은 당연히 기록의 삭제를 요구했었다.[39] 즉 그들은 자신들의 저지른 학살을 숨기기 위해 돈으로 매수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학살이 없었다는 나무위키나 수구 세력들의 궤변 및 극우스러운 결론은 눈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1970년 1월 10일 <뉴욕 타임스>는 "한국군이 수백 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살해했고, 주베트남 미군 사령부의 고위 장성이 한국군에 대한 조사를 중단시켰다"고 보도했었다.[40]
나무위키를 비롯한 정신나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부정론자들은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이라는 문서에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 문서들은 죄다 출처가 한겨레와 경향 그리고 사이비 인권운동가 비전문가인 구수정의 자료라고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우선 1990년대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공론화 시킨 구수정은 2000년대 호찌민 인문사회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물이며, 따라서 이들의 주장은 구수정이 비전문가라는 얘기부터가 허위사실이다. 국내에서 베트남 전쟁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도미엔의 경우 선행연구로 구수정의 연구를 인용한 것이 나와 있다.[41] 또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역사 전공자인 서중석, 박태균, 한홍구, 정병준 등의 저명한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며, 이러한 활동에 적극 옹호 및 호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위키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선 정말 이를 악물어가며 애써 외면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출처가 죄다 한겨레꺼만 있다는 주장도 말 그대로 헛소리다. 로버트 스미스(Robert M. Smith) 기자가 쓴 1970년 1월 10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Vietnam Killings Laid to Koreans”라는 기사를 보면, “한국군의 강력함이 남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의도적인 살상에 기반한 것임이 일반인들에게 폭로 되었으며, 한국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마을에서 무조건 1/10의 민간인을 사살하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무시무시한 얘기가 나온다.[42]
뉴욕타임즈지의 크레이그 휘트니(Craig Whitney)는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로부터 한국군의 학살행위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받았는데 그는 베트남에서의 동맹군의 장래 역할에 초점을 맞춘 한 기사의 끝부분에다 그들이 본 사실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으며, 그 기사의 첫 머리에서 휘트니는 “한국군은 중부 해안의 방어가 빈약한 지역에 군사적 방패(휘트니는 누구를 위한 방패인가는 말하고 있지 않다)를 제공하고 있었다.”고 썼다. 심지어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얼마나 심했는지, 베트남어를 하는 두 명의 퀘이커 교도인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는 5년 동안 한국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작전지역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벌였으며, 그들은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심지어 1966년 당시 미국의 랜드연구소는 의 “Viet Cong Motivation and Morale Study”라는 연구조사를 통해, 한국군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록상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다. 물론 이 자료는 기밀처리되어 유포가 억제됐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퀘이커 교도인 다이안과 마이클 존슨은 조사 보고서를 보면, “만일 지뢰가 폭발한다든지 해서 한국군 중에 사망자가 생기는 경우 이들이 빈번이 가장 가까운 마을을 습격하여 20명 혹은 120명에 달하는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 정책은 나치 독일의 정책화 비슷했지만, 남한의 민간인 포로학살은 나치가 2차 세계대전 도중 서유럽에서 자행한 학살들에 비하면, 보다 전방위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었다.”라는 내용도 나온다.[43]
그러니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출처가 단순히 본인들이 싫어하는 한겨레와 경향과 같은 출처만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무지함이 아주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나무위키의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이라는 정신나간 문서이며, 안타깝게도 소위 역사를 좋아하는 덕후들은 반공주의와 국뽕에 심취하여 이런 근거 출처 불명의 뇌피셜만 가득한 나무위키 문서를 믿으면서 전공자들의 주장은 전혀 안보고 있는 아이러니가 나타나는 것이다.
남베트남 측의 전쟁범죄
당연한 얘기지만, 미국의 괴뢰국이던 남베트남도 자국민에 대한 전쟁범죄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제주 4.3 사건때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남베트남 군인들이 베트콩 가족들을 살해한 데 대해 "그들은 게릴라들의 친척이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베트콩에 동조적이었으며, 그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비전투원의 신분이 아니다."는 식의 태도로 임했으며, 미군은 남베트남 장교들이 종종 위협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죽이고 집을 파괴하며, 가축을 도살하기를 원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당시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전개한 평정작전의 이론은 "농민들이 베트콩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무차별 테러를 가하는 것"이었다.[44]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 | 존폴밴이 보기에 후인반까오(존폴밴이 담당했던 지역의 남베트남군 사단장)나 다른 남베트남군 장교들은 체계적인 근거나 이유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협할 정도로 충분히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파괴하며 가축을 도살하길 원한다고 판단했다. 남베트남 측의 평정화 작전 이론은 명백히 말하자면 베트남 농민들에게 베트콩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테러를 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후인반까오나 그 지역 도지사 그리고 구청장들도 이러한 고문행위나 살인행위를 막기 위한 그 어떠한 일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들은 그런 테러행위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테러행위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우린 그 베트콩 빨갱이 지지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우린 그 베트콩 빨갱이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강력하고 냉정한지를 보여줄 것이다.는 식이었다. 그들(미군고문단과 남베트남군)이 항공공습과 포격에 대해 논할 시에 후인반까오에게서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일관된 대답은 항공기와 대포가 정부의 군사력을 과시했고, 남베트남 민중이 이를 존중하도록 만들었다는 대답뿐이었다. 또한 존폴밴은 왜 후인반까오와 대다수 남베트남군 장교들이 이런 잔혹한 학살과 끔찍하기 짝이 없는 가학적 행위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지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밴은 또한 남베트남군들이 일반적인 베트남 농민을 인간 이하의 생물로 간주하는 것도 알아차리게 됐다. 이들은 인간을 죽이거나 인간이 사는 마을과 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냥 동물 사냥하듯이 몰살시키고, 동굴 밖으로 내쫓는 짓을 했다. | “ |
- Neil Sheehan, 『A Bright Shinning Lie - John Paul Vann and America in Vietnam』, Vintage, 1989, p.109~110 |
오딘지엠 정권 시기의 학살을 보면, 남베트남군들과 그 장성들은 베트민과 베트콩 소탕을 주장하며 이러한 전쟁범죄 행위들을 자행했다. 일본의 전 요미우리 신문 기자 오쿠라 사다오에 따르면, 1960년까지 응오딘지엠 정권 하에서 80만 명이 수감되고, 9만 명이 처형당했으며, 19만 명 이상이 고문으로 장애인이 되었다. 남베트남의 소위 '정치훈련센터'에는 항상 8천 명에서 1만 명이 수용되어 있었고, 400개 지역에 농민수용소를 설치해 농민들이 대대로 살아온 가옥을 파괴하고 강제 수용했다.[45]
1961년부터 1966년까지 대략 41만 5,000명의 남베트남 민간인이 미국과 남베트남에 의해 죽었다는 추정치도 존재한다. 베트남 국제조정위원회의 캐나다측 인사인 휴이 캠벨(Hugh Campbell)은 미군사고문단이 개입한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대략 2년이라는 기간 동안만 보더라도 남베트남에서 16만 명의 민간인이 남베트남측의 군사작전으로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이러한 주장의 출처는 사이공 정부측의 공식적인 추정치를 기반으로 한 것이며, 이들의 군사작전으로 죽은 이들 중 대다수가 민간인을 차지했다.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세력들은 진상조사를 하면 현 베트남 정부가 찔릴 것이라 생각을 하는데, 베트남 분단과 전쟁 당시 국제조사단의 조사는 전혀 안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베트민이 무차별 테러를 일으켰다 주장하는 세력들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학살을 무수히 많이 자행한 것 처럼 주장하지만, 정작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보복혐의로 추정되는 사건을 조사하는 데 책임이 있던 국제통제기구위원회(ICC)의 조사 결과 자료는 무시한다. 국제통제기구위원회에 따르면 "초기 휴전 협정 2년 기간 동안 북베트남민주공화국에 대한 19건의 항의신고만 접수 받았으며, 그중 오직 한 건만이 살해나 테러로 추정한 것"인데 반해, 같은 기간 동안 "남베트남 사이공 정권에 대한 최소 214건 이상의 항의 신고가 접수됐는데, 이 중 상당수가 학살과 관련한 것이었다."[46] 따라서 실제 국제조사단 조사에서도 베트남 전쟁 당시 양측의 테러와 학살은 베트민이나 베트콩보다 미국과 남베트남이 훨씬 더 광범위하고 잔혹했음을 알 수 있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처럼 민간인 학살과 백색테러를 숱하게 자행했고, 규모 또한 결코 작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약탈과 아녀자 겁탈의 경우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보다 훨씬 심각했다. 1964년에서 1965년 남베트남 주둔 미군 특수부대에서 근무한 도널드 던컨 특무상사의 경우 베트콩과 남베트남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 남베트남군이 한 마을이나 지역을 자주 통과할수록, 그 마을이나 지역은 더욱 확실하게 베트콩에 동정심을 보였다. 베트콩은 마을 주민들이 거주하는 초라한 집에서 잠을 잤지만, 남베트남군은 주민들이 사는 집을 약탈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자주 베트콩은 농사를 도우며 작물을 심거나 주민들과 같이 재배했지만, 남베트남군은 항상 변함없이 주민들이 농사 및 작물을 재배하는 곳을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아녀자 강간은 베트콩 사이에서 철저하게 금지되고 철저히 처벌받는 행위였지만, 남베트남군 사이에서 매우 흔한 일이라 더 나쁜만행의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거의 보고하지 않았다. | “ |
- Edward Herman, 『Atrocities in Vietnam: Myths and Realities』, Pilgrim Press Philadelphia Boston, 1970, p.26~27 |
공산측 학살과 전쟁범죄에 대한 극우들의 물타기 및 역사왜곡
“ | 베트남의 혁명파는 수년간에 걸친 개별테러 속에서 상당한 피를 흘렸다. 이들 테러 중 일부는 계산된 것이었지만, 나머지는 수시로 되는 순전히 보복적인 살상의 어마어마한 압력 때문에 조직의 기강이 산발적으로 해이해진 것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요자들이 용의주도한 대량학살 작전을 써서 상당수의 비무장 민간인을 죽였다는 확증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혁명철학 및 혁명전략, 기층주민과 그들의 관계 그리고 뛰어난 기강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 “ |
-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 임채정(역), 『미국 대외정책론』, 일월서각, 1985, p.397 |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의한 학살은 없었던 것일까? 기록에 따르면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의한 학살로 의심을 받는 보고가 아예 없진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구정공세 당시 후에 전투에서 발생한 학살이다. 물론 구정 공세 시기 발생한 소위 '후에 학살'은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이 사실상 사이공 협력자 처단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일정부분의 무고한 인명살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미국과 남베트남의 주장에 따르면 후에 전투 과정에서 한 달간 2,500명에서 많게는 6,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후에 전투 당시 미군 전투지원사령부는 게릴라 포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서류 뭉치에서 행정 공무원 1,893명, 정치인 48명, 악덕 지주 790명을 처형했다’고 기록된 문서를 확인했다고 한다.[47] 일단 문서상에 있는 처단자 대상을 보면, 후에 학살이라고 알려진 사건 또한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들이 그랬던 것 처럼,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 후에 학살을 운운하며 반공주의에 기반한 선전을 일삼지만, 이 전쟁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인 주체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오로지 공산주의를 악마화하고 제국주의자들의 실상을 가리고자 하는 극우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적인 성질이 강하다. 반공주의자들이 외면하는 사실이지만, 후에에서의 학살은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후에를 탈환한 남베트남군과 자경단에 의해서도 발생했다. 남베트남측은 후에를 탈환한 이후 보복단을 조직해서 월맹 점령하 부역자 학살에 나섰으며, 탈환 이후 발견 된 수천구의 시체 중 얼마가 그 남베트남측 보복에 의한 것인지 알길이 없다.
후에 학살에 대한 극우 세력들의 물타기에는 정보의 편향성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후에 학살로 몰타기를 시도하는 이들은 구정 공세 이후 남베트남에서 발표한 문서나 일부 미국인들의 자료를 이용하여 오직 공산주의자들의 일부 처형만을 학살로 간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구정 공세 당시 대략 한 달간 양측의 공방전이 있었던 후에의 경우 최소 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전투과정에서 사망했고, 미군의 폭격으로 도시의 70%가 파괴되었다. 즉 민간인의 피해는 당연히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것이 상대적으로 더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학살로 물타기하는 이들은 이러한 맥락마저도 무시하고 있고,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후에 전투 당시 CBS 텔레비전 특파원인 존 로렌스는 어니스트 치트햄 중령에게 미 해병대와 게릴라 사이에 갇힌 민간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질문했는데, “나는 현재 나쁜 놈들로 여겨지는 그 무고한 이들이 민간인들이라 생각한다.”라고 치트햄 중령은 대답했었다.[48]
그것과는 별개로 미국의 전면적인 베트남 전쟁 개입 이전에 베트콩들이 촌락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지방 관리와 남베트남에 우호적인 협력자들을 대상으로 포섭에 실패할 경우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트콩들의 경우 민중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싸웠기 때문에 설사 그러한 학살이 있었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다. 이규봉 작가의 저서 '미안해요!베트남'에 따르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어떠한 원칙을 목표로 했는지 알 수 있다.
“ | 1.인민을 존중할 것
2.인민을 도울 것 3.인민을 수호할 것 4.토지작물에 피해를 주거나 인민의 가옥과 재산을 침해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 5.인민이 판매나 대여를 원하지 않는 것은 구매나 차용을 요구하지 말 것 6.살아 있는 암탉은 산악 민족의 집에서 가져가지 말 것 7.약속은 어기지 말 것 8.인민의 신조나 관습을 무시하지 말 것 9.우리의 인민을 경멸하고 있다고 오해를 받을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 것 10.일상 작업에서 인민을 도울 것 11.가능할 때는 언제나 시장에서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물건을 구입해 줄 것 12.여가 시간에는 항전에 쓸모 있는 이야기를 하되 보안에 주의할 것 13.주민에게 국어와 기본 위생을 가르칠 것 14.처음에는 공감대를 조성하기 위해 그리고 나서는 미신을 버리게 하기 위해 각 지역의 관습을 연구하며 그에 친숙해지도록 할 것 15.올바르고 근면하며 훈련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인민에게 보여줄 것 |
“ |
-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푸른역사, 2011, p.101~102 |
따라서 베트콩이 학살을 무자비하게 조성했다거나 아무런 이유없이 마구잡이로 학살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반공주의에 기반한 허황된 날조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한 후에 학살만 하더라도 소위 수천 명의 민간인이 공산당에게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미국과 남베트남측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각색한 자료다. 이러한 자료는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 그리고 가레스 포터 등이 반박한 바가 있고, 마릴린 영 또한 수천 명이 아닌 300~400명이라는 자료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후에 학살에는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후에 전투 현장을 취자한 필립 존스 그리피스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수천 명의 죽음이 월맹군과 베트콩의 학살로 둔갑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미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PBS 베트남 전쟁 시리즈의 경우 후에 학살로 2,500명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었다고 말하지만, 최소 6,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폭격으로 파괴된 잔해 속에서 죽었다고 언급했다. 그 외에도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적 이론가인 알란 우즈 또한 2018년 구정 공세 50주년 관련 글에서 6,000명의 후에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죽었다고 얘기했다.[49] 따라서 후에 학살의 본질은 미군 폭격으로 인한 학살이지, 월맹군과 베트콩에 의한 대량 처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촘스키와 허만에 따르면, 이 학살의 증거로 제시되는 북베트남측 문서들 마져도 사실은 학살자 명단이 아닌 재교육자 명단이며, 미국 정부의 인사 더글라스 파이크(Douglas Pike)가 이를 왜곡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의 학살로 알려진 후에 대학살은 미국과 남베트남측의 과장과 각색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여순항쟁에서도 미국과 한국이 빨치산들이 저지른 잔혹행위를 심각한 수준으로 과장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비추어 보았을 때, 후에 대학살도 실제 있었던 일에 비해 미국과 남베트남측에 의해서 심각하게 과장되고 각색되었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 찬양하는 반공주의자들은 어느 정신나간 미국의 네오콘 학자는 자기 멋대로 덧샘 뺄샘한 근거 출처 불명의 이상한 계산기 자료를 가지고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최소 13만에서 30만을 학살했다는 소리를 지껄이지만, 말그대로 전혀 검증되지 않은 거짓말일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학살이 1이면 한국군의 학살이 6이었듯이 베트남 전쟁 또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 보다 연합국에 의한 학살이 더 많았다. 네오콘 학자 루돌프 럼멜은 자신이 만든 통계에서 미군의 폭격을 학살로 간주하지 않는데, 눈가리고 아웅식 논리다. 애초에 폭격 자체가 적이라는 타겟을 죽인다는 목적하에 민간 지역에 폭탄을 투하하게 되는 데 그것이 학살이 아니라면 일방적인 학살도 학살이 아닌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미군의 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수백만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는 분명한 전쟁범죄다. 베트남 전쟁을 연구해온 윤충로 교수의 박사 논문인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에 따르면 베트콩과 같은 세력들이 용의주도한 대량학살작전을 써서 상당수의 비무장 민간인을 죽였다는 확증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연합국 측에 비해 훨씬 적었다고 한다. 그것은 수년간 프랑스 제국주의와 싸워오면서 대중들을 설득하고 끌어들였던 그들의 경험에 기반한 행동이었다.[50]
심지어 서방의 반공학자와 자유주의 성향의 학자의 추산으로도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학살은 미군보다 규모가 훨씬 작다. 어스틴 머피의 책을 보면, 이들 부르주아 학자들 추산으로도 미군 군사작전으로 죽은 민간인이 40만 명인 반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민간인 죽음은 4만 명 안팎으로 추산했다.[51] 물론 이 4만 명이라는 추산도 후에 대학살을 포함한 일부 베트콩이 했다고 추정되는 허위정보 기재가 다분히 의심되는 자료와 공정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남베트남의 악의적이고 자의적인 보도에 의한 것으로, 반공주의자이자 베트남 전쟁 참전 지지론자인 권터 루이의 과장되고 편향된 추산이다. 루이의 편향된 인용은 촘스키와 같은 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따라서 올바른 추산이라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아무튼 서방 자유주의 학자의 추산으로만 봐도 베트남 혁명 세력이 저지른 테러와 학살의 규모는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이 저지른 것에 비하면 1/10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실제로 비교해보자면, 미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테러와 학살은 당연한 얘기지만 혁명 세력을 아늑히 능가한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또한 베트콩 총사령관이던 호앙 반 타이는 민간인 학살과 무차별 폭행 그리고 강간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중국 혁명 시기 마오쩌둥이 이끌던 홍군이나 이현상 사령관 휘하의 지리산 빨치산, 나치 치하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던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혁명 군대 그리고 쿠바 혁명 당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게릴라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역사적으로 게릴라 투쟁에 있어서 기본적인 지침이었다. 그런 군대가 수십만 단위로 학살했다는 어느 정신나간 유치뽕짝 네오콘의 주장은 게릴라 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모르는 행위일 뿐이며 몰역사적 시각이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을 정리하자면 베트남 전쟁 당시 양측 모두 학살이 있긴 했지만, 그 학살이 가장 심각했던 것은 북베트남이나 베트콩이 아닌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운동가인 수잔 브라운 밀러 가 쓴 『성, 성폭력, 성폭력의 역사』라는 책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당시 뉴질랜드인 출신인 피터 어네트 기자를 포함하여 사이공 외신 기자단이 가진 일반적인 인식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거의 강간을 범하지 않는다."였다. 실제로 피터 어네트는 수잔 브라운 밀러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 | 베트콩은 테러를 일상의 무기로서 사용했습니다. 베트콩들은 그 과정으로서 마을의 지도자들을 일렬로 세워 그들의 목을 쳐버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난행을 처벌 또는 응징제도의 한 부분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약탈을 하거나, 먹을 것을 훔치거나 혹은 성적 폭행을 자행하는 따위의 일은 일체 금지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베트콩이 강간했다는 얘기를 별로 듣지 못했습니다. | “ |
- 수잔 브라운 밀러, 편집부 옮김, 『성, 성폭력, 성폭력의 역사』, 일월서각, 1990, p.134 |
미국 군사정보기관은 전쟁터에서 죽은 베트콩으로부터 노획된 서류들을 일상적으로 보도 기자들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어네트는 이 서류들 가운데 강간 사건을 저지름으로써 징벌로 후방에 이송되거나 총살된 베트콩 병사들에 관련된 서류들도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어네트는 "베트콩은 강간에 따른 처형을 공개화한다. 강간은 그들에게 있어서 중범이었다. 난행하고 약탈하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실패로 간주되었다. 이와 동시에 베트콩은 적에 의해 강간당한 부녀자들을 영웅으로, 즉 적이 저지른 잔학행위의 표본으로 만들곤 했다."고 강조했다.[52] 수잔 브라운은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에 체류하며 이를 관찰한 관찰자들이 99% 가까이가 남성들이었고, 이들은 "베트콩이 저지르는 강간 사건이 왜 없는 지에 대해서 항상 당혹하고 있었다."고 책에 썼다. 예를 들어 23일 동안 베트콩에 의해 생포되어 포로생활을 경험한 뉴질랜드 여성 웨브는 석방된지 몇 개월 후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성적으로 농락당했는지의 여부를 알고 싶어했으며,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하자 대부분 실망의 빛을 보였으며, 묻는 이들이 베트콩의 엄격한 기율을 이해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증언했다.[53] 1968년 구정 대공세 당시 후에 시에서 베트콩에 의해 생포되었던 미국인 여성인 마죠리 넬슨 박사 또한 석방되고 난 이후 "자신의 정조에 이상이 전혀 없음을 주장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 |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월남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이라면 그들의 마음 속에 확실히 의문시되는 문제이다. 그 밖에 베트콩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다. 확실히 그러한 의문은 있을 수 있다. 우리들에게 성적 만행이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단순히 운이 좋았구나 하고 우리는 몇 차례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우리들이 베트콩의 캠프에 왔을 때 베트콩 간부들 역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주 명백해졌다. 그들은 우리의 프라이버시가 존중될 것임을 확실히 밝혔다. | “ |
- 수잔 브라운 밀러, 편집부 옮김, 『성, 성폭력, 성폭력의 역사』, 일월서각, 1990, p.136 |
베트콩의 양민학살은 대체로 미국 정보당국에 의해 과장되거나 각색되며, 무조건적으로 책임이 전가되는 경향을 띄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인 기자인 가츠이치 혼다는 사이공의 미군 총정보국에서 나온 “베트콩의 테러활동”이라는 제목의 주간 보고서를 조사했었는데, 베트콩의 테러는 사이공의 ‘정보통제’에 의해 일반의 조사로부터 사실상 은폐되고 있으며, 살인사건이나 테러가 결코 베트콩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곧 드러났다고 했다.[54] 1970년 10월 북베트남의 포탄이 안호아에 있는 한 고아원에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런 사건이 일어나자 ABC의 조지 왓슨(Geroge Watson)은 겁에 질려 “아무도 이 학살에 대비하지 못했다. 이것은 북베트남인이 안호아에서 저지른 비이성적인 살인이다”라는 논평을 했다. 그러나 민간인 사상자는 압도적으로 미군의 화력에 의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이 지적한 책임 소재는 7/10의 비율로 북베트남군에게 돌아갔다.[55] 1968년 미군이 자행하여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미라이 학살에는 일부 생존자들이 남베트남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1972년 봄 남베트남군의 공습 및 포격으로 이 수용소가 파괴되면서 미라이 학살 생존자들이 사망했다. 이는 베트콩의 테러로 왜곡되었다. 노엄 촘스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그러한 사실들이 단순한 사고로서 등장하기도 하였다. 한 가지 특히 기이한 예를 들자면, 미라이 학살 사건의 생존자들이 강제 소개되어 있던 수용소가 1972년 봄 남베트남군의 공습 및 포격으로 대부분 파괴됐다. 이 파괴는 통상 그렇듯이 베트콩의 테러로 돌려졌다. 이 사실은 그 지역에 있던 퀘이커 봉사단원에 의해 폭로되었다. | “ |
-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 임채정(역), 『미국 대외정책론』, 일월서각, 1985, p.417 |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연구한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인 최정기 교수는 피닉스 프로그램(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전쟁범죄)과 같이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지만, 무차별적으로 특정 지역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민간인들 사이에서의 상호 공격도 그렇게 빈번하거나 큰 규모가 아니었다고 한다. 또한 베트민이나 베트콩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소문은 주로 미국 정보당국이 제기하였지만, 별다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그 이후 헛소문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75년 당시 남베트남군 장교로 통일 이후 재교육 과정에서 2년 6개월 동안 정치범 수용소에 갖혔던 트롱이라는 사람은 그의 가족이 타인에게 맞은 적도 있고 현재도 사회생활에 장애가 많지만, 전쟁기간 민간인 학살이라고 부를만한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즉, 그 결과 베트남에서의 학살은 대체로 군 작전으로 이루어진 공습 및 포격에 의해서 발생하였거나 ‘수색 및 파괴(Search and Destroy)’라는 작전수행 중에 일어났다.[56][57]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월맹군이나 베트콩이 가장 많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주장은 반공주의적 망상인 것이다.
또한 베트남 전쟁을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해석하려는 이들은 하노이 힐튼과 같은 미군 포로대우에 대해 트집을 잡는다. 그러나 미군 조종사 대다수가 본국으로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 그 자체에는 주목하지 못하고, 오로지 반공주의적인 그들의 증언에만 함몰되어, 북베트남측이 어떠한 주장을 했고 또 어떠한 행동을 보였는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다. 생각해보자, 베트남 전쟁 당시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들은 적국을 방문한 반전성향의 민간인들을 만나고, 또 요구에 따라 전쟁중에 석방되기도 했었다. 지금까지의 전쟁에서 이런일이 자주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답을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사실은 북베트남 측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포로 조종사들을 대우해줬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작 반공주의자들은 남베트남의 포로수용소에서 어떠한 일들이 자행됐는지는 눈꼽만큼도 보지 않는다. 푸꾸옥의 호랑이 우리나 경찰과 정보기관의 야만적인 고문 등 북베트남 보다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에서 반공주의에 함몰된 이들이 베트남 전쟁사를 얼마나 편향적으로 보는지 알 수 있다.
반면에 하워드 진이 베트남에 평화운동가로 가서 구출해온 비행 조종사 오벌리 소령의 경우 "나를 맡은 베트남 경비가 목숨을 세 번이나 살려주었고, 등에 염증이 생겨 아팠을 당시, 베트남측에서 설파제를 줘서 치료를 해줬으며, 일반 수용소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세뇌교육 같은 것도 없었고, 베트남 역사에 관한 책도 몇 권 읽었으며, 먹을 것도 많았고, 다치면 치료도 받았다."고 말했다.[58]
베트남 정부가 진상조사를 두려워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이 학살 때문이라는 음모론과 반박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인터넷 뉴스 댓글이나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위에서 언급한 월맹군 학살 운운과 더불어 현 베트남 정부가 민간인 학살의 진상조사를 두려워한다는 주장도 적잖게 나오고 있다. 당장 반공주의적 시각이 판을 치는 나무위키의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의 베트남 정부의 비협조 문단을 보면, 후에 대학살을 운운하며 북베트남이 가장 많은 학살을 자행했다는 극우들의 자위질이 보인다.[59]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의도적으로 무시되거나 생략되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베트남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게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이라는 주장이 성립되야 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에 언급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베트남 전쟁에서의 민간인 피해와 학살의 주체는 미국이었기 때문에 성립자체가 불가능하다.
한국전쟁을 생각해보자. 한국전쟁 시기 북한은 3년간 미군의 폭격을 받았고, 최소 40만 명에서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의 폭격으로 남북 베트남인을 통틀어 최소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장 캄보디아만 하더라도 40~80만 명이 폭격으로 죽었고, 라오스에서도 35만 명이 죽었다. 이런 민간인 피해의 원인은 당연하게도 미국이었다. 고엽제로 인한 피해는 500만 명이다. 최소 수십만 명이 사망했고, 2000년대까지 매년 5만 명의 기형아가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이 고엽제의 후유증은 참전국 모두를 괴롭히고 있다.
직접적인 민간인 학살의 경우 당연하게도 미국과 남베트남이 자행한 것의 규모가 베트콩에 비해 훨씬 더 컸다. 해방 후 한국전쟁 시작전까지 대략 10만 명의 남한 민간인이 작은전쟁을 통해 미국과 이승만에 의해 죽었듯이, 1955년부터 1965년까지 대략 10~17만 명 의상의 민간인이 미국과 응오딘지엠 정부 하에서 학살당했다. 이는 유명한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의 베트남 전쟁 관련 저서에도 나오는 수치다. 그에 반해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이 자행한 테러는 지주와 자본가를 타겟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은 남베트남 민간인들이 그들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20세기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이나 그리스 내전 그리고 한국전쟁과 니카라과 산디니스타의 투쟁 및 티토의 빨치산 투쟁을 보면, 당연하게도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주체는 좌익이 아니라 우익들이었다. 이는 베트남 전쟁도 마찬가지며, 그 규모에 있어서 우익이 자행한 것이 훨씬 더 컸다. 남베트남 내에서의 경찰에 의한 고문과 인권유린은 해방 후 친일경찰들이 자행했던 만행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2000년대 한국정부의 진실하해조사위원회는 좌익의 학살과 우익의 학살을 똑같이 조사했으며, 그 결과 우익의 학살이 1/7 비율로 더 많았다. 그리고 인민군이나 빨치산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간주되던 민간인 학살이 조사과정을 거치며 우익에 의한 것으로 진상규명되는 사례가 많았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비교가 무슨 연관성이 있냐는 식으로 얼버무리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은 과거 제주 4.3이나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사건에 관여한 세대가 15년 뒤에 참가한 전쟁이다. 당장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만 하더라도 제주 4.3때 진압군을했던 인물이다. 즉,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우리나라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봐야한다. 또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의 군사전략은 제주4.3 사건 당시 해상으로 부터 반경 5km를 벗어난 곳은 적색지역으로 규정했던 전략과 큰 차이가 없다. 특히 자유사격지대(Free Fire Zone)의 존재는 제주 4.3 사건 당시 중산간 지대를 빨갱이 지역으로 규정한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베트남 전쟁과 이런 유사성을 보이는 제주 4.3 사건을 보면, 학살의 90%는 우익들이 저질렀다. 그런데, 그런 연관성이 있는 베트남 전쟁에 그리고 그 제주 4.3 사건을 포함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이들이 한국군으로 개입한 베트남 전쟁에서 월맹군과 베트콩이 더 많이 학살을 많이 자행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후에 대학살이니 뭐니 하는 온갖 반공주의적 날조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과 한국이 인민군 학살을 운운하며 자신들의 자행한 천인공노할 학살을 가린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베트남 전쟁 시기 베트콩의 테러로 알려진 사건들이나 죽음들은 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가 이를 조작한 근거도 수두룩 하다. 실제로 사이공의 미군 총정보국에서 작성한 '베트콩 테러'관련 문서를 본 일본인 기자 가츠이치 혼다는 베트콩의 테러가 사이공의 ‘정보통제’에 의해 일반의 조사로부터 사실상 은폐되고 있었음을 알아냈고, 따라서 살인사건이 결코 베트콩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들어났다. 이러한 조작의 사례는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적잖게 일어났다. 따라서 진상조사를 하게 될 경우, 베트콩이 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남베트남군이 자행한 것으로 밝혀질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다.
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언급하자면 이렇다. 한국전쟁의 경우 2023년 7월에 방영한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④ 민간인학살편에서 진실화해위 조사를 통해 좌익 학살보다 우익의 학살이 더 많음을 밝혀 냈다.(해당 영상 링크 14분부터 확인 가능) 핀란드 내전의 경우 좌익은 테러와 학살로 1,600명을 죽인 반면 우익은 7,263명을 죽였다. 제주 4.3의 경우 주한미육군사령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최소 80% 이상이 우익 토벌대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60] 스페인 내전의 경우 내전을 통틀어 적색테러로 희생된 사람은 대략 3만 8,000명인데 반해, 전쟁 기간 통틀어 우익의 백색테러로 희생된 사람의 숫자는 대략 20만 명 정도다.[61] 과테말라 내전의 경우 1999년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역사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에 따르면, 과테말라 정부와 반군 양측 모두 학살을 비롯한 잔혹행위를 저질렀지만 학살의 책임은 거의 대부분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 처형부대에 있다고 밝혔으며, 인권유린과 폭력행위로 인한 피해자 42,275명의 사례를 조사한 결과 그 중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 처형부대에 책임이 있는 경우가 93%에 달했고, 3%만 반군에 책임이 있었다.[62]
엘살바도르 내전의 경우 심지어 유엔 조차도 FMLN 좌익게릴라가 내전 기간 동안 민간인 살해의 5%에 책임이 있는 반면, 모든 민간인 살해의 약 85%는 엘살바도르 군대와 암살단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추정했다.[63][64] 또한 베트남 전쟁의 경우 어스틴 머피는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민간인 사망자가 200만 명이라고 보고하고 있지만, 테일러가 제시한 추정치에 기반하여 미국과 베트남 양 군대의 군사적 충돌로 인해 사망한 민간인들이 40만 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과 그리고 공산군이 의도적으로 죽인 민간인들이 약 4만 명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미국의 야만적인 학살로 목숨을 잃은 민간인들이 100만 명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책에 언급했다.[65] 참고로 그가 인용한 월맹군 테러 및 학살 추정치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참전을 적극 지지했던 권터 루이의 추정치로 미국 측에서 비교적 미국 정보당국에서 놉게 잡은 추정치를 인용한 것이다. 이 추정치는 박태균 교수 또한 한겨레에서 출판한 『베트남 전쟁』에서 인용하기는 했다. 또한 에드워드 허만의 경우 유능한 현장 조사자들 사이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베트남 전쟁 당시 게릴라전에 맞서 미군이 화력을 집중배치하는 것이야 말로 극심한 베트남 민간인 희생률을 급상승시키는 주요 원인이며, 아무리 낮게 잡은 추산이라도 "최소 80% 이상의 민간인 사상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막강한 화력을 동원한 군사작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심지어 미국-베트남 친선 봉사 협회와 함께 남베트남에서 1년 반 동안 있었던 칼 스톡의 경우 이것보다 훨씬 더 높은 추정치를 내놓았는데, "무려 99% 혹은 그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 사상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것이라는 추정치를 내놓았다."[66]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때, 진상조사 그 자체는 미국이나 괴뢰국가 남베트남에게 불리하면 불리하지, 유리할 수가 없다. 따라서 현재 베트남 정부가 베트남 전쟁 시기 일어난 학살에 대해 찔릴 이유가 없으며, 이런식의 사고관은 그저 반공주의에 심취한 인사들의 희망사항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우익들이 벌인 테러와 학살이 공산주의 세력들 보다 훨씬 더 광범위했듯이, 좌우 대립적 전쟁인 핀란드 내전ㆍ스페인 내전ㆍ제주4.3ㆍ한국전쟁ㆍ과테말라 내전ㆍ엘살바도르 내전 등 적잖은 내전 및 좌우대립 사례에서 우익들의 학살이 좌익들 보다 훨씬 광범위했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학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러한 예시와 베트남 전쟁 당시 학살이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반공에 심취한 나무위키는 이러한 근거 출처 자료들을 삭제하고 싶어한다. 삭제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려 안달이 난 수준이다. 왜냐하면, 그래야지 자신들의 흑역사와 근거 출처 미진한 점을 조금이라도 감출 수 있기 때문이며, 이들 다수가 제1세계적 친미 친서방주의에 심취한 역덕류 반공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침략 논쟁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는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반지성적인 광적 반공주의하의 대한민국 사회에선 베트남 전쟁을 마치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침략인 것 처럼 왜곡해왔다. 그런 반지성적인 광적 반공주의 사상을 가진이들은 현재도 이와같은 주장을 사실로 믿고 있다. 이는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나무위키나 수구 세력들의 유튜브 영상들을 비롯한 문서 및 매체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침략으로 일어났다고 하며 학계의 일반적인 서술과는 동떨어진 주장을 하고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현실 부정일 뿐이다. 일각에서는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세력이 호치민과 북베트남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쪽은 미국과 응오딘지엠이었다. 반공주의자들은 마치 베트남 전쟁이 간첩들과 게릴라들이 일으킨 것 처럼 과대 포장하지만,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얘기하는 베트콩은 1960년 남베트남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조직이었다. 물론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았으나, 어디까지나 지원이지 북베트남의 공식적인 개입이 아니다. 반공주의자들의 궤변과는 달리 베트남 전쟁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 인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64년 통킹만 사건이다. 이는 사건을 조작한 로버트 맥나마라도 인정했고, 미국 또한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사건을 조작했던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물이다. 위에서 상술한 북베트남군의 침투에 대해 좀 더 얘기하자면, 그런식의 국경 침입은 비단 북베트남군만 했던 것이 아니다. 미국의 그린베레와 마이크 포스같은 특수부대들 남베트남군 특수부대들 또한 DMZ나 호치민 루트 쪽을 마구잡이로 넘어가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무시하는 건 마치 나치독일의 런던 대공습과 같은 영국 폭격이 영국에 대한 침략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비슷하다. 1971년 반전운동가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7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펜타곤 페이퍼는 당시 미제국주의가 1945년 부터 1967년까지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계획하고, 실행했는지를 낱낱이 밝혔다. 따라서 북베트남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극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역사 왜곡이다.
반공주의적 시각에서 베트남 전쟁을 해석한다면 통킹만 사건은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으로 인하여 시작된 사건이었고, 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이를 북베트남이 지원하면서 시작된 전쟁일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다.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부터 이미 개입한 상태였고, 남북베트남의 분단 고착화 시킨 주체가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60년에 남베트남에서 창설된 베트콩은 어디까지나 남베트남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였고, 북베트남은 이를 지원하는 형식이었다. 해방 후 한반도 상황에 비교해 놓고 보자면, 제주 4.3 항쟁이나 여순민중항쟁과 같은 대한민국 내부에서 일어난 항쟁들과 비슷한 형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제주 4.3 항쟁이나 여순민중항쟁을 북한의 침략행위로 간주하지 않듯이, 베트콩이 남베트남 내부에서 전개했던 무장 투쟁 또한 북베트남의 일방적인 침략행위로 볼 수는 없다. 북베트남의 공식적인 남베트남 침공 행위는 베트남 전쟁이 거의 다 끝나가던 1972년 ‘부활절 공세’를 감행하면서 부터인데, 이 시기에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화 정책’을 발표함에 따라 단계적인 철수를 감행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소위 우리가 일반적으로 간주하는 베트남 전쟁의 성격이 바뀌게 되는 시점이다. 여기서 나올 수 있는 주장이 구정 공세에 관한 것인데,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했던 구정 공세 또한 베트콩이 주축이 되어 전개했고, 공격을 감행한 대부분의 병력은 베트콩들이었다. 민주화 운동가이자 베트남 전쟁을 연구한 리영희가 쓴 베트남 전쟁에 나오는 구절이다.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는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반지성적인 광적 반공주의하에서 학문적 진실을 추구했던 그는 베트남 전쟁이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 | 베트남 전쟁은 그에 앞선 스페인 내전과 함께 현대사에서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이라고 일컬어져왔다. 근대에 들어서 동서양에 많은 전쟁이 있었고, 20세기 현대사에서만도 전체 지구를 덮은 처절한 전쟁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유독 스페인 내전과 베트남 전쟁을 두고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괴로워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베트남 동란'은 그 성격과 배경이 복잡하다. 그 전쟁의 한쪽 당사자가 공산주의 세력이고 다른 한쪽이 반공주의 세력이라는 사실만으로 베트남 동란을 '공산주의 대 반공주의의 대결'로 획일화한 단색적 도식화는 진실에서 너무나 먼 것이었다. 바로 그 '반공산주의'의 주도자로 그 동란에 뛰어든 미국이 결국 실패라고 만 것은 베트남 동란의 복잡한 성격과 배경을 지나치게 단색적으로 도식화했던 결과다. 베트남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1945년 8월 연합국의 승리로 일본의 점령에서 해방되었다. 그러자 인도차이나반도를 100년 동안 지배하다 일본에 쫓겨나갔던 프랑스는 일본의 철수 후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고 군사적 재점령을 시도했던 것이다. 호치민을 지도자로 하는 베트남 인민은 일단 손에 넣은 독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독립세력과 식민세력, 아시아 후진민족과 유럽 백인세력, 원시적 민병과 현대적 군대 사이의 8년간에 걸친 전쟁은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의 결정적 패배로 끝났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또는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 인민은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그 승리를 다지는 강화조약인 제네바 협정으로 국토와 인민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운을 감수해야 했다. 제네바 협정은 "북위 17도선을 임시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베트남 인민군과 프랑스 연합군은 각기 군사분계선의 북쪽과 남쪽으로 철수하여 집결한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은 결코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로 해석될 수 없다. 이 협정체결로부터 2년 후인 1956년 7월 남북베트남을 아우른 총선거를 실시하여 베트남을 통일되도록 한다"고 규정했던 것이다. 약속된 총선거에서 호치민의 승리가 확실한 것을 예상한 미국은 프랑스를 대신해서 남베트남의 실권을 장악하는 한편, 미국에 망명 중이던 응오딘지엠을 들여보내 총선 실시 거부를 선언케 하였다. 이 시점에서부터 제2차 베트남 전쟁 즉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거니와, 베트남 전쟁은 그러므로 단순한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다. 민족주의 대 제국주의, 독립투쟁 대 식민주의, 혁명 대 반혁명, 통일 대 분열, 독립 대 의존, 인권 대 반인권, 자유 대 억압, 황색인 대 백색인, 아시아 대 서양, 낙후 대 현대, 원시적 소총 대 초현대식 폭격기, 주판 대 전자 계산기, 사랑 대 증오 그리고 그밖에도 상상할 수 있는 20세기의 모든 갈등요소가 뒤범벅이 되어서 전개된 전쟁이었다. 그것이 "20세기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 “ |
- 리영희, 『베트남 전쟁』, 두레, 1985, p.5~7 |
위에 인용한 리영희의 책은 베트남 전쟁을 마치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일으킨 것으로 보는 관점은 박정희 시대의 반공주의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나무위키를 포함한 극우세력들이 베트남 전쟁에 대해 마치 공산주의측이 일으킨 것 처럼 역사왜곡을 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북베트남군 또한 구정 공세 당시 공격에 참가하긴 했지만, 북베트남측의 공식적인 남베트남 침공 행위는 1972년 부활절 공세 때고, 1968년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감행한 구정 공세는 남베트남에서 일으킨 내부 봉기에 가까웠다. 1964년 일어난 통킹만 사건의 핵심은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이 있었느냐 혹은 없었느냐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가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명분을 찾기 위해 한 사건을 조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생각해 보았을 때,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다는 일각의 주장은 역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주장이 아닌 정치적인 선전 영역에 가까우며 과거 미국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인 베트남 전쟁을 합리화 하려는 주장이다. 따라서 미국이 전면적으로 참전하게 된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이 일으킨 전쟁이 아닌 미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이다.
또한 1963년 존 F. 케네디 사망 후 린든 존슨은 국가안보행동각서 273호에 서명함으로써 베트남 문제에 좀 더 직접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그 각서를 통해 미군도 비밀작전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1952년부터 1977년까지 25년간 CIA 요원으로 일했던 랠프 맥기히는 후일 당시 CIA가 미국 내 여론 조작을 위해 했던 작전을 폭로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CIA는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무기 수 톤을 자체 창고에서 꺼내 베트남 연안에서 조업하는 선박에 실은 다음 가짜로 총격전을 벌였다. 그런 다음 서방 기자들을 불러들여 북베트남이 베트콩에게 무기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한다.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통킹만 결의안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된 미국이 무차별 북폭인 롤링썬더 작전을 실행했는데, 롤링썬더 작전 구실로 든 것이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는 플레이쿠의 미군 헬리콥터 기지에 대한 베트콩의 공격이다. 이 공격에서 미군 8명이 죽고 100명이 부상당했는데, 당시 사이공에 있던 국가안보보좌관 맥조지 번디는 존슨 대통령과 그 참모들에게 하노이(북베트남)가 “도발했다”고 보고했지만,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탬과의 인터뷰에서는 플레이쿠 기지 피격 사건은 다른 에피소드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즉 당시 베트콩이 흔히 가하는 공격에 불과했지만, 북폭 명분을 만들기 위해 한 사건을 과장보도함으로써 침략의 구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의 저서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이라는 책을 보면 오늘날의 전쟁(베트남 전쟁)은 본질적으로 전투원이 아니라 민간인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지상에 존재하는 생물체들을 쓸어버리는 데 드는 무기와 비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미국 같은 나라들은 특히 닥치는 대로 폭격하고 불태우려는 유혹을 본질적으로 뿌리치기 힘들다고 그는 주장했다.[67]이어서 그가 책에서 한 주장은 베트남 전쟁이 호치민이나 북베트남의 침략전쟁이 아닌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히 입증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현재 미국이 이용하고 있는 가장 절망적인 테러가 존재한다. 미국은 다른 나라들이 게릴라 활동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들에까지 전쟁을 확대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다. 베트남 전쟁이 미 국무부가 구실을 대는 것처럼 ‘자생적이고 지역적인 반란’이 아니라 이른바 ‘간접적’인 외세의 침략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북베트남 폭격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베트콩은 1945년 이후 스페인에서 일어난 게릴라전 이상의 의미는 없다. 스페인 게릴라전은 스페인 경찰이 남긴 소수 문건과 지역 신문의 기사를 제외하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우리 기억에서 사라졌다. 반대로 남베트남 사람들이 현정부를 자임하는 군부 편에 서 있다면, 혹은 단지 평화롭게 살기를 바랄 뿐이라면, 게릴라 운동이 일어났거나 여전히 진행중인 캄보디아나 미얀마 같은 인접국보다 베트남이 더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 “ |
- 에릭 홉스봄, 김정한·안중철(역), 『혁명가』, 길, 2008, p.235~236 |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정말로 민중의 지지를 받았는가?
“ | 미군은 적들이 나뭇가지를 가림막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대한 양의 다이옥신 가스를 뿌렸다. 독가스의 투여로 네덜란드 크기 규모의 삼림지대가 황폐해졌고, 무수한 베트남인이 간암과 간질과 알레르기를 앓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전황에서 반전이 일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미군의 작전 수행이 잔인했기에 주민들에게서 베트콩 전사들에 대한 동정심이 일었다. | “ |
- 이리에 아키라, 이동기·조행복·전지현(역),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945년 이후 서로 의존하는 세계, 민음사, 2018, p.115 |
위의 인용문은 2013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시리즈로 출판한 <하버드 C.H.베크의 세계사 1945년 이후 서로 의존하는 세계>에 나오는 내용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지원하던 남베트남 세력은 과거 프랑스에 협력하던 민족반역자들이 주류 정치를 맡은 사회였고, 대다수 베트남인들 입장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또한 프랑스와 다를 것이 없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중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지지했다. 일각에서는 베트콩의 게릴라전은 공포통치를 바탕으로 테러와 학살을 동반하며, 수행한 것으로 묘사한다. 마치 1980년대 레이건 정부 시절 미국 CIA가 지원했던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과 같은 존재로 묘사하려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콘트라 반군의 경우 전폭적으로 미국의 지원에 의존했고,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콘트라 반군은 대중의 지지가 없었기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이웃 나라인 온두라스에 배치됐으며, 수시로 국경을 넘나들면서 작전을 전개했다. 콘트라 반군의 경우 미국의 철저한 지원 하에, 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고 대중의 지지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베트콩의 경우는 달랐다. 베트콩은 농촌을 기반으로 농민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급선무였으며, 따라서 함부로 양민학살을 자행하기 지극히 어려운 조건에 있었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이들과 달랐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많다.
우선 1960년에 창설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의 경우 응오딘지엠 정권의 독재 정치와 테러 학살에 못이긴 민중들이 내부 역량을 바탕으로 조직된 단체다. 이들의 대중성은 미국의 반공주의적 역사학자 더글라스 파이크(Douglas Pike) 또한 인정하고 있다. 하워드 진이 쓴 미국 민중사를 보면, 파이크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는지 다음과 같이 나온다.
“ | 대중조직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민족해방전선은 남베트남의 2,561개 촌락에 전국적인 규모의 정치·사회 조직을 만들어 냈다. 민족해방전선을 제외하고는 남베트남에는 실제로 대중에 기반을 둔 정당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 “ |
- 하워드진, 유강은(역), 『미국 민중사 2』, 이후, 2008, p.213 |
더글라스 파이크는 1962년 초반 기준으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성원이 대략 30만을 헤아린다고 추산했으며, 1971년 세상에 공개된 미국의 1급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The Pentagon Papers)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 오로지 베트콩만이 농촌지역에서 실질적인 지지를 얻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 “ |
- 하워드진, 유강은(역), 『미국 민중사 2』, 이후, 2008, p.214 |
베트콩이 테러와 학살을 아예 안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러한 전술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베트콩은 실제로 주민들과 항상 같이 했고, 이들의 충성심을 자발적으로 유도해내는데 성공적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테러와 폭력이 아닌, 주민들에 대한 공감과 설득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남베트남군이던 응우옌 베 대령의 주장을 통해 알 수 있다.
“ | 베트콩들은 은신처를 마을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주민들과 함께 보냈다. 어려움도 상부상조했다. 지역 주민들과 관심사를 함께 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보호해 주었고, 수시로 정보도 교환했다. 그들은 주민들과 항시 같이 있었다. | “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455 |
베 대령은 주민들과 베트콩 게릴라의 관계와 문제점 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미국 CIA의 지원전문가인 코머에게 보고했다.
“ | 일선 경찰들은 주민들에게 접근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남베트남 군인들은 낮에만 순찰을 돌고 있으며, 과거에 시행했던 마을 소개작전은 게릴라들에 대한 동정심만 유발시켜 놓았다. 수천 년 동안 베트남의 농촌들은 때묻지 않은 마을 자치기구를 잘 유지해 오고 있을 뿐 아니라, 불교와 유교적인 생활 관습은 개인보다는 가정이나 공동 사회에 대한 충성심을 우선시한다. 게릴라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과 희로애락을 같이하면서 그들의 충성심을 유도해 낸다. | “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455 |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남베트남에 주둔하며 미군사고문단을 지냈던 존 폴 밴(John Paul Vann)은 남베트남군과 정부가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않고, 오히려 이들의 적대관계에 있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닐 시핸의 책이자 영화로도 제작된 '밝게 빛나는 거짓말(A Bright Shinning Lie)'을 보면,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존 폴 밴이 남베트남의 민중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잘 드러난다. 실제로 존 폴 밴은 남베트남 정부와 군대 그리고 베트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남베트남 정부를 지지하는 대중적인 정치 기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 정부는 농촌주민 및 도시 하층주민의 착취를 지향하고 있다. 사실상 현 정부는 베트남 상류계층으로 프랑스인을 대치시킨 프랑스 시민정부체제의 연속이다. 농업인구의 불만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과의 제휴를 통해 광범위하게 표현되고 있다. | “ |
-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 임채정(역), 『미국 대외정책론』, 일월서각, 1985, p.361 |
베트콩과 북베트남군들이 어떠한 인사들로 이루어졌는지는 당시 참전했던 이들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61년 롱안(Long Anh)에서 민중봉기에 가담했던 한 무토지 농민은 응오딘지엠 정부 하에서의 사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으며, 왜 베트콩에 가입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 | 나는 가난했다. 나는 땅을 전부 빼앗겼다. 돈이 없어서 아이들을 돌보기도 힘들었다. 1961년에 공산당이 주도하는 민족해방전선의 선전 요원들이 나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가난한 농부들과 만나 부자와 빈민 계급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부자들이 항상 프랑스에 봉사해 왔으며 프랑스 당국의 힘을 빌려 빈민을 억압했다고 말했다. 다른 생존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빈민들은 지주의 노예로 전락했다. 당원들이 우리에게 선전한 내용은 빈민들이 부자에 맞서 일어서지 않으면 영원히 지배받으리라는 것이었다. 자유를 쟁취하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우리 마을 주민은 약 4,300명이었다. 이 가운데 아마 10여 명 가량이 지주였을 것이다. 최고 부자가 500헥타르를 소유했고, 나머지가 각각 적어도 20헥타르씩 가지고 있었다. 다른 주민들은 소작인이거나 순수한 빈농이었다. 나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억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해방전선(베트콩)에 가입한 것도 그 때문이다. | “ |
- 조너선 닐, 정병선(역), 『미국의 베트남 전쟁』, 책갈피, 2004, p.60~61 |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된 한 공산당원은 미국인 심문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 | 과거에 농민들은 자신이 가장 경멸받는 계급이라고 느꼈다. 땅이 없거나 가난한 농민들은 특히 더 그랬다. 마을 행사나 축제가 있을 때에도 그들은 한쪽 구석에 서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을의 유력자처럼 식탁에 앉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들이닥쳤고 농민들은 권력을 얻었다. 지주들한테서 토지를 몰수했다. 이제 농민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쳐다볼 수 있다. 그들에게 사회적 지위와 힘이 생긴 것이다. 지주와 다른 계급들은 그들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당 간부의 대다수가 농민이고, 당원의 대다수도 농민이며, 군 지휘관의 대다수도 역시 농민이다. | “ |
- 조너선 닐, 정병선(역), 『미국의 베트남 전쟁』, 책갈피, 2004, p.61 |
케네디 행정부에서 베트남 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가 1966년에 대통령 린든 B. 존슨에게 보낸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 | 전반적으로 농촌 지역 주민들은 이렇게 믿고 있다. 남베트남 정부는 마을에 들이닥쳐도 확고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지만 베트콩은 다르다. 남베트남 정부와 협력했다가는 베트콩의 처벌을 받는다. 남베트남 정부는 주민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남베트남 정부의 하급 단위는 토호들의 기구다. 남베트남 정부는 썩었다. | “ |
- 조너선 닐, 정병선(역), 『미국의 베트남 전쟁』, 책갈피, 2004, p.105 |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베트콩과 북베트남이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은 바로 남베트남 정부가 과거 프랑스 식민지 협력 인사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은 현재의 친미주의자이자 남베트남 정부의 앞잡이었다는 역사적인 사실 때문이다. 즉 남베트남 정부는 지주와 자본가를 중심의 정치체제였고, 이 계급의 대다수는 과거 일본과 프랑스 제국주의에 협력하다가, 현재에 와서 새로운 외세인 미국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세력이었다. 따라서 남베트남 정부는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것이고, 대중성과 정통성이 하나도 없었다. 반면 베트콩과 이를 지원하는 북베트남군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와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던 독립운동 세력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학자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베트남 전쟁 당시 반전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남베트남 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역대 남베트남 정권은 그 어느 것이건 자발적인 민중의 가치를 못받고 대중적 정치토대가 없는 권력이었다. 사이공 정권은 과거에는 프랑스 식민지 체제의 계승자였다. 미국의 개입 이후에는 시급히 필요한 사회개혁은 모두 민족해방전선이 실시하였고, 베트남 사회에서는 그 사회개혁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소위 남베트남 정부는 민족해방전선과 도저히 정치적으로 경쟁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이 사실은 사이공 정부 지도자들 자신이 자인하고 있다. 티우, 키, 키엠 등 남베트남군 최고 사령관급은 모조리 자기 민족·국가의 해방·독립에 반대해서 식민지국 프랑스 군대의 장교로 싸운 사람들이다. | “ |
- 리영희, 『베트남 전쟁』, 두레, 1985, p.104~105 |
인터넷에서 소위 역사덕후라고 불리는 작자들은 마치 리영희 교수가 좌파 뽕에 빠져서, 60년대 낡은 사관을 가지고 베트콩을 미화하고, 주권국가 남베트남을 마치 편향된 좌파사관으로 인식한다는 소시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비단 노엄 촘스키 뿐만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의 출처는 베트남 전쟁을 직접적으로 계획하고, 침략행위에 협조를한 미국 인사들의 발언에서도 확인이 가능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1969년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대표로 참가했던 남수석 대표인 윌리엄 해리먼(William Harriman)은 1월 20일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 | 남베트남에서의 투쟁의 승부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 없다. 한쪽은 자기 민족을 억압한 식민지 세력에 협력한 사람들이 이끄는 집단이다. 다른 한쪽은 긴 독립투쟁과 반식민지투쟁에 몸바쳐 싸워온 사람들이 이끄는 집단이다. 어느 쪽 지도자들이 베트남인을 더 사랑하는 가는 분명한 사실이다. 민중의 사랑을 받는 쪽이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 | “ |
- 찬딘반, 김민철(역),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 친구, 1988, p.179 |
남베트남 농촌에 대한 태도에서 베트콩과 남베트남 정부 관리들의 태도는 대조적이었다. 랜드 연구소 측의 피츠 제럴드(Fitz Gerald)는 1960년에조차도 많은 남베트남인들은 정부관리와 어떠한 개인적인 접촉도 하지 않았고 일생의 반을 보냈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반공주의 역사학자 더글라스 파이크는 1967년 자신이 쓴 책에서 "만약 중국 혁명의 정수가 전략이었고, 베트민의 정수가 정신이었다면, 남베트남의 제3세대 혁명 게릴라전의 정수는 조직이었다."라고 주장했다.[68] 아래의 인용문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 | 문) 지역관리들과 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많이 접촉합니까?
답) 그들은 세금을 거둘 때만 나타납니다. 그들은 거의 주민들과 만나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문) 남베트남 정부가 베트콩이 하는 방식처럼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낸 적이 있습니까? 답) 남베트남 정부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업습니다. |
“ |
- 윤충로,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선인, 2005, p.477 |
지금까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어떻게 해서 지지받았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일부 반공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말하는 베트콩의 테러의 실체는 무엇일까? 물론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의한 테러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상당부분 미군과 남베트남측에 의해 과장되고 각색되며 왜곡되기까지 했었다. 이는 촘스키와 허만이 집필한 <미국 대외정책론>에 잘 나오며, 그 대표적인 예시가 호치민 정부의 토지개혁(Land Reform)과 구정 공세 당시 베트콩이 한 것으로 알려진 후에 대학살(Massacre of Hue)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 농촌 및 마을에서 테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베트콩이 테러를 밥먹듯이 했다거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 | 앞서 보았듯이 제네바 협약은 호치민에게 베트민군 전체를 남부에서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베트민을 지지하는 수십만의 게릴라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각기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여전히 경계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디엠의 테러 정책은 곧바로 보복 테러를 당했다. 그러나 디엠의 폭력 행위는 그가 적으로 간주한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했던 반면 베트민은 디엠의 앞잡이들만 테러 대상으로 삼았다. 거의 아무도 테러 당한 앞잡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이처럼 디엠은 농민을 멀리했고, 베트민은 가톨릭 신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지지를 받았다. | “ |
- 찰스펜, 김기태(역), 『호치민 평전』, 자인, 2001 p.280 |
소위 반공주의자들이 베트민과 베트민 지지자들 그리고 베트콩이 테러와 학살을 벌였다며, 베트남 전쟁 그 본질을 이상하게 물타기 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는 이 전쟁의 본질적인 책임을 전혀 보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1967년 3월 랜드 연구소에서 작성한 연구 조사 자료를 보면 항불전쟁 당시 베트민 병사였던 한 사람의 증언을 인용한 것이 나온다. 전직 베트민 투사였던 한 사람은 그의 마을에서 있었던 응오딘지엠 정부의 테러행위 및 유혈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 우리 마을 촌장은 외지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잔인했다. 그는 항불운동 당시 공산당 당원이었던 사람들을 모두 추적하여 그들을 체포하고 살해했다. 그는 우리 마을에서 모두 합쳐 14명의 공산당원을 살해했다. 나는 머우람(Mau Lam) 마을에서 그가 두 명의 공산당원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들은 두 손을 등뒤로 결박당한 채 군인들에 의해 생매장되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 “ |
- J.J Zasloff, Origins of the Insurgency in South Vietnam, 1954~1960: The Role of the Southern Vietminh Cadres(RAND, March 1967), p.11 |
베트남 중부인 꽝남성에서 저항군이었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 1956년 꽝남의 지방당국은 이전의 항불 저항군들에 대한 테러조치를 시작하였다. 저항군 부대 1만 명이 체포되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학살당했다. 나는 내 목숨을 부지해야 했으며 그래서 1960년까지 산 속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같은 마을 출신의 다른 3명과 함께 살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부족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 “ |
- J.J Zasloff, Origins of the Insurgency in South Vietnam, 1954~1960: The Role of the Southern Vietminh Cadres(RAND, March 1967), p.12~17 |
이와 같은 부정할 수 없는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소위 전직 베트민 출신들을 포함한 지지자들이 테러와 무장투쟁을 시작하기 전인 응오딘지엠 집권 초기부터 양민학살을 동반한 이들에 대한 학살과 탄압이 대대적으로 남베트남 정부 하에서 자행됐다. 즉, 베트남 전쟁 초기 남베트남에서의 학살과 테러의 시작 점은 베트민과 그 지지세력이 아닌 응오딘지엠 정부였으며, 결과적으로 그 근본적인 책임은 응오딘지엠 정부에게 있는 것이다. 당시 남베트남의 미군 고문단으로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이쪽 분야를 심층있게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레이스(Jaffrey Race)는 저서 <War Comes to Long An>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 정부의 테러 행위는 혁명운동측 보다 훨씬 심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베트민 출신에 대한 소탕작전, '공산주의 마을'에 대한 포격 및 지상공격, 그리고 '공산주의 동조자들'에 대한 검거 등이 그것이다. 1960년에서 1965년까지 롱안(Long An)에서의 혁명운동이 계속 강화되었던 것은 바로 정부측의 이러한 테러전략 때문이었다. | “ |
- Jeffrey Race, 『War Comes to Long An』, University California, 1971, p.197 |
이러한 종합적인 사실들을 따져 보았을 때,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그저 반공주의적 프로파간다에 입각한 시각이며,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들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악마화하는 시각은 지금으로부터(2022년 기준) 100년 전에도 미국에서 되풀이 했던 역사이기도 하며, 1857년 인도 세포이 항쟁 당시 영국 제국주의가 인도 독립군을 학살하며, 내세웠던 논리이기도 하다. 1920년대 니카라과에서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이끄는 부대들이 침략자 미국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이자, 미국의 언론들은 산디노 부대를 “약탈자, 살인자, 악마적 투기꾼들, 강간자들, 침략자들”과 같은 수식어로 흑색선전을 했지만, 실제로 훨씬 더 많은 학살을 벌인 세력은 전투기를 동원에 양민에게 폭탄을 투하하던 미국 제국주의였다. 따라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역사적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하며, 이들을 학살자나 범죄자로 모는 시각은 19세기 영국 제국주의가 인도 세포이 항쟁을 악마화하던 시각과 미국이 1920년대 니카라과를 식민지 지배하며 내세우던 논리랑 하등 다를게 없는 친서방 제국주의적 논리일 뿐이다.
대중 매체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한 미국 영화들은 매우 많다. 물론 그 영화들 중엔 <그린 베레>[69]나 <에어 아메리카>[70] 그리고 <위 워 솔져스>같이 미국이 백전백승 한다는 미국식 영웅주의를 시전하는 소위 국뽕영화도 있지만, 대체로 작품성이 높은 영화들이 많다. 그 대표적인 작품을 뽑자면 <풀 메탈 자켓>이나 <플래툰>, <지옥의 묵시록>, <굿모닝 베트남>, <전쟁의 사상자들> 그리고 <7월 4일 생>등이 있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부정적으로 다루며 주로 반전을 호소한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 한 영화들은 대체로 작품성이 높은 편이다. 한국에서 만든 작품성 있는 베트남 전쟁 영화로는 <하얀 전쟁>과 <알 포인트> 그리고 <님은 먼 곳에>가 있다. 2017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더 포스트>라는 영화도 있는데, 미국의 거짓말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다. 베트남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로는 PBS에서 만든 <베트남 전쟁: The Vietnam War>이 있다. 다만 1편당 평균 1시간 25분 이상의 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다큐멘터리이기에 보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굉장히 많은 인물의 인터뷰와 증언을 토대로 제작되었고, 베트남 전쟁을 객관적으로 보려했던 감독의 각고한 노력이 곳곳에서 보이는 작품이기에 베트남 전쟁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감상할 가치가 매우 높은 명작이다. 그외에도 2019년에는 1966년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베트콩과 교전을 벌였던 <롱탄 대전투: The Battle of Long Tan>라는 영화가 개봉했다.[71] 2020년에는 영화 <말콤X> 감독으로 유명한 스파이크 리가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서 보인 미국의 인종문제와 결합하여 <DA 5 블러드>라는 베트남 전쟁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라는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소재로한 영화도 개봉했다.
게임 중에는 FPS 게임으로 유명한 콜 오브 듀티 블랙옵스1(2010년작)이 베트남 전쟁에서의 케산 포위전과 후에 전투 그리고 라오스에서의 MAC-V의 작전을 다루고 있다. 2020년에 나온 콜 오브 듀티 콜드 워에서도 베트남 전쟁을 다루고 있다.
관련 서적
미국에는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한 서적들이 아주 많지만, 정작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냈던 한국의 경우 출판된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은 아쉽게도 그리 많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책들보다도 적다. 여기에 언급된 책들 대부분은 이 글을 쓰는데 참고했던 서적들이다.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저, 유경찬(역), 을유문화사 출간, 2002[72]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저, 힌겨레 출판 출간, 2015 *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저, 정병선(역), 책갈피 출간, 2004 * 최고의 인재들, 데이비드 핼버스템 저, 송정은 황지현(역), 글항아리 출간, 2014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저, 창비 출간, 1974 * 역사 속의 베트남 전쟁, 후루타 모토오 저, 박홍영 (역), 일조각 출간, 2007 *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비엣 타인 응우옌 저,부희령 (역), 더 봄 출간, 2019 * 베트남 전쟁의 한국 사회사, 윤충로 저, 푸른 역사 출간, 2015 * 1968년 2월 12일, 고경태 저, 한겨례 출판 출간, 2015 * 미안해요! 베트남, 이규봉 저, 푸른 역사 출간, 2011 *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윤충로 저, 선인 출간, 2005[73]
관련 문서
각주
- ↑ 민간인 사망자 총 집계치를 인용한 것이다. 사실 베트남 전쟁 당시의 정확한 민간인 사망자의 규모를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남북 베트남을 합쳐 대략 2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 미국이 프랑스에게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한건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부터였다. 심지어 그들은 1954년 디엔비엔푸가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전투병 파병을 고려하기도 했었다.
- ↑ 유일상,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하나로에드컴, 2021, p.200
- ↑ 미국의 역사학자 가레스 포터는 자신의 저서<평화는 거부되었다 Peace Denied>에서 북베트남 토지개혁에 대한 미국 정보기관 추산이 매우 과장되었다면서, 자신의 계산으로는 2,500명 정도라고 주장했다. 반면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듀이커는 호치민 평전에서 13,000명에서 15,000명 사이라고 추산했다. 아무튼 과거에 돌던 북베트남 토지개혁으로 인한 사망자가 10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은 과장되었다.
- ↑ Marilyn B. Young, 『The Vietnam Wars 1945-1990』, Harper Prennial, 1991, p.56
- ↑ 미국에 협력했던 소수민족으로는 에데 족, 참족, 브루 족 등이 있다.
- ↑ 이들이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그랜 토리노에 나왔던 애들이다.
- ↑ 하워드 진, 유강은(역), 『미국민중사 2』, 이후, 2008 p.214
- ↑ 폴 토머스 체임벌린, 김남섭 옮김,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이데야, 2023, p.314~315.
- ↑ 그 또한 부패한 인물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1975년 남베트남이 붕괴될 때 그는 비행기 몇 대에 2톤이나 되는 금괴를 실어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도주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매우 부패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232~233을 참조
- ↑ Nguyễn Khắc Viện, 『Vietnam A Long History』, Thế Giới Publishers, 2015, p.275
- ↑ PBS 베트남 전쟁에서 인터뷰 했던 한 베트콩 출신의 참전용사는 방송에서 "빈지아 전투 이후 미군이 개입하지만 않았다면 우리는 1965년이나 1966년에 사이공을 접수했을 겁니다"라고 증언한다.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264~265
- ↑ 이 인터뷰는 영화 7월 4일생에서도 나온다.
- ↑ 박태균 『베트남 전쟁』, 한겨레출판, 2015, p.117
- ↑ 국내에도 번역되어 널리 읽히는 트로츠키 전기 3부작의 저자이기도 하다.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430~431을 참조
- ↑ 유일상,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하나로에드컴, 2021, p.100~101
- ↑ 베트남 전쟁 시기 대부분의 전투는 베트콩이 미군을 상대로 치렀다.
- ↑ 유인선, 『베트남의 역사(2018년 개정판)』, 이산, 2018, p.427을 참고함
- ↑ 유일상,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하나로애드컴, 2021, p.125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467을 참조
- ↑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푸른역사, 2011, p.123
- ↑ 송필경,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p.16
-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02
- ↑ Austin Murphy, 『The Triumph of Evil』, European Press Academic Publishing, 2000, p.22
- ↑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Picador, 2013 p.13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426
- ↑ Vietnam: American Holocaust (2008)
- ↑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Picador, 2013 p.128
- ↑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Picador, 2013 p.212
- ↑ 황성환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 상』, 민플러스, 2018, p.425
- ↑ Jeremy Kuzmarov, Modernizing repression: police training and nation building in the American century, MIT Press, 2012.
- ↑ 학살 참전 한국군 이우석씨 -남은 평생 하는 일은
- ↑ 채명신, 『베트남 전쟁과 나』, 팔복원, 2006, p.288
- ↑ 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 쿠데타가 지속될 당시 응우엔 반 티우와 더불어 쿠데타를 종결시켰던 인물이다. 즉 남베트남 정치계에서 핵심적인 인물어었다 할 수 있다.
- ↑ 비엣 타인 응우옌, 부희령(역),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더봄, 2019, p.197을 참조
- ↑ 비엣 타인 응우옌, 부희령(역),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더봄, 2019, p.204
- ↑ 박태균, 『베트남 전쟁』, 한겨례출판, 2015, p.98
- ↑ 도미엔, 『붉은혈맹』,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p.22
- ↑ Noam Chomsky·Edward Herman,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 (The Political Economy of Human Rights - Volume I)』, Haymarket Books, 2014, p.365
- ↑ Noam Chomsky·Edward Herman,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 (The Political Economy of Human Rights - Volume I)』, Haymarket Books, 2014, p.365~367을 참조
- ↑ 허호준,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선인, 2014, p.479
- ↑ 유일상,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하나로에드컴, 2021, p.68
- ↑ Edward Herman,『Atrocities in Vietnam: Myths and Realities』, Pilgrim Press Philadelphia Boston, 1970, p.20~21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377
- ↑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Picador, 2013 p.103
- ↑ The Tet Offensive: the turning point in the Vietnam War
- ↑ 윤충로,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선인, 2005, p.550과 책에 인용된 각주를 참고
- ↑ Austin Murphy, 『The Triumph of Evil』, European Press Academic Publishing, 2000, p.39~40을 참조.
- ↑ 수잔 브라운 밀러, 편집부 옮김, 『성, 성폭력, 성폭력의 역사』, 일월서각, 1990, p.134
- ↑ 수잔 브라운 밀러, 편집부 옮김, 『성, 성폭력, 성폭력의 역사』, 일월서각, 1990, p.135~136
- ↑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 임채정(역), 『미국 대외정책론』, 일월서각, 1985, p.417
- ↑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 정경옥(역),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344~345
- ↑ 최정기, 민간인 학살의 사회구조적 요인 비교,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2011
- ↑ 논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 ↑ 하워드 진, 김한영(역), 『하워드 진의 역사에세이 - 가치 있는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개정판)』, 마인드큐브, 2022, p.341
- ↑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 ↑ 한석지ㆍ함옥금, 「제주 4ㆍ3학살과 미국의 책임 - 초토화작전을 중심으로」,『교욱과학연구』 1, 제주대학교 교육과학연구소, 2004, p.252
- ↑ 앤토니 비버, 김원중 옮김, 『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교양인, 2009, p.170~182
- ↑ 박구병, 「과테말라의 ‘열띤 냉전’과 제노사이드 : 1980년대 초 원주민 학살」, 『4.3과 역사』 18, 제주4.3연구소, 2018, p.281
- ↑ 관련문서 1
- ↑ 관련문서 2
- ↑ Austin Murphy, 『The Triumph of Evil - The Reality of the USA'S Cold War Victory』, European Press Academic Publishing, 2000, p.39~40.
- ↑ Edward Herman, 『Atrocities in Vietnam: Myths and Realities』, Pilgrim Press Philadelphia Boston, 1970, p.42~43
- ↑ 에릭 홉스봄, 김정한·안중철(역), 『혁명가』, 길, 2008, p.235~236
- ↑ 윤충로,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선인, 2005, p.477
- ↑ 극우 반공주의자에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한 존 웨인이 출현했다. 내용도 심히 오리엔탈리즘적이다.
- ↑ 아이언맨으로 유명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국뽕영화에 자주 출현하는 것으로 유명한 멜 깁슨이 주연으로 출연했다.
- ↑ 호주 또한 베트남 전쟁을 도미노 이론에 입각해서 봤다. 이 영화도 그런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 이 문서를 편집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자료다. 저자가 북베트남측과 남베트남측, 전쟁을 계획한 사람과 반전운동가까지 폭넓게 인터뷰한 자료를 모은 책이라 베트남 전쟁을 알기 위해선 꼭 읽어야할 책이다.
- ↑ 윤충로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