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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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제2인터내셔널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도한 마르크스주의 국제 기구로,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운동 세력간의 공동 행동을 추구하였다. 이후 사회민주주의의 우경화 진행 과정에서 내분을 겪다 제3인터내셔널이 분리되었다.
1940년까지 이름만 남은 채 '노동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 존속하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 이어진다.
역사
창립배경
1864년 창립된 제1인터내셔널은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표자회의에서 해산이 결정된다. 제1인터내셔널이 해산된 이유는 파리코뮌 패배 이후 곳곳에서 탄압이 벌어져 인터내셔널의 각 지부가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바쿠닌 등의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분파투쟁이 격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제1인터내셔널이 이미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여,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의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1인터내셔널은 각국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당들의 출현을 위한 토대를 형성하였다. 실제로 독일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덴마크, 미국,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웨덴, 핀란드 등에서 당들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당의 창설은 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내었다.
제1인터내셔널은 해산되었지만,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 연대는 확장되었고 여러 나라 운동의 지도자들은 지속적인 접촉을 유지하였다. 다른 나라의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고 여러 가지 캠페인을 수행하는 것은 통례가 되었다. 사회주의 신문은 다른 나라의 노동운동에 관한 정보의 전달범위를 늘려갔다. 이는 경험의 교환과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 정신에 의한 노동자 교육을 촉진하였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군사적 충돌 위협과 식민지 확장에 대항한 공동의 호소문들이 자주 나왔으며, 군국주의와 전쟁 위협에 대한 투쟁은 각각의 민족들에 속한 프롤레타리아트를 단결시켰다. 신문, 사회민주주의 정당 의원들, 그리고 노동자 모임은 지배집단의 국수주의적 정책을 단호하게 비난했고, 이러한 정책들의 반민중적 성격을 폭로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실행을 옹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신문들, 각 정당의 당대회, 그리고 노동조합들은 새로운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연합의 조속한 결성을 더 많이 요청하게 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국제적인 노동자대회를 제안했다.
창립이후
제2 인터내셔널은 1889년 7월 14일 열린 국제 노동자 회의에서 설립되었다. 제1 인터내셔널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본질적으로 유럽의 노동운동에 기반을 두었으나 이는 선행자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았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도권을 잡았으며 여기에 속한 당들은 대중의 기반을 이미 구축했거나, 또는 구축해가고 있는 과정에 있었다. 1904년에 이들은 무려 21개국에서 선거에 참여하여 660만표를 획득하였으며 의회에서 261석을 얻을 수 있었다. 1914년에는 400만명의 당원을 확보하였으며 유권자는 1200만이 되었다. 제2 인터내셔널은 기본적으로 당과 노동조합의 방만한 동맹이었다.
1900년에는 직접적인 기능보다도 기술적이고 중재적인 역할을 하는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이 브뤼셀에 설치되었고, 상임 서기는 카밀 위스망스였다. 다른 사상적 조류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 인터내셔날에 속했던 정당들 중에서 영국 노동당(1908년에 승인된)을 제외하고서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들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1893년과 1896년 총회에서 정치투쟁에 관한 문제로 패배한 뒤에 인터내셔날로부터 축출되었던 아나키스트들도 초기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1895년 엥겔스가 죽은 후 제2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공식적 성격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두 이론가는 카우츠키와 플레하노프였다.
인터내셔널은 4년에 2회씩 정기총회를 열어 1차 회의에서는 공동의 행동을 결정하고, 2차 회의에서는 정책의 문제를 놓고 토론했다. 1차 회의에서는 1890년부터 8시간제 노동을 지지하여 노동절 때마다 모든 나라에서 시위를 조직할 것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우파와 좌파, 그리고 중도파 간의 투쟁은 처음에는 국내 정당들 내에서 시작되었으나 곧 국제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사회주의 정당 전술 문제
제2인터내셔널은 초기에 열린 몇 차례 대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일상 요구와 노동자투쟁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와 관련한 결의들을 했다. 1891년에 열린 브뤼셀 대회는 세계노동자들에게 "부르주아 정당의 지배에 반대하는 노력을 결합하고, 노동자가 정치 권리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든 이 권리를 임금노예제로부터 해방을 이룩하기 위해 이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893년에 열린 취리히 대회는 사회주의 운동의 정치권력 장악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노동자계급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결의했으며, 1896년에 열린 런던 대회는 경제투쟁과 관련하여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강조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노동자계급의 당면 요구 실현을 위한 투쟁을 강조했는데, 브뤼셀 대회와 런던 대회는 노동자계급의 가장 중요하고도 유효한 투쟁수단의 하나로서 파업의 의의를 지적했으며, 노동조합과 활동형태의 문제, 국제 결합의 강화에 관한 토의도 행해졌다. 그리고 취리히 대회는 특별결의로서 노동조합의 전국 연합체를 모든 나라에서 결성하고, 산업별 국제노동조합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은 제1인터내셔널이 각국의 개별 노동조합 문제를 다루었던 만큼 충분히 노동조합 문제를 배려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 독일 사회민주당의 많은 간부가 노동조합운동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 더욱 중요하게는 당시 거의 모든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세심한 지도에 따라 운영되는 전국 노동조합과 지방적 전국적 총연합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의 전술문제에 대한 광범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런던 대회는 노동자계급은 최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투쟁수단을 이용해야 하고, 이 경우 의회전술 문제에 대해서도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결의했으며, 취리히 대회와 런던 대회는 결의로서 사회주의 정당의 원칙과 독립성을 파괴할 수 있는 타협은 용인될 수 없으며, 부르주아 정당과는 별개의 노동자계급의 정책을 제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제2인터내셔널과 노동조합의 문제
20세기에 들면서 노동자계급의 국제 결합과 공동행동 강화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제2인터내셔널은 다양한 국제조직과 결합시스템으로 발전했습니다. 통상 3년마다 열리는 대회에는 노동자조직의 대표 파견이 확대되고 정비되었죠. 대회가 거듭될수록 참가국의 수도 불어났습니다. 1900년에 열린 파리 대회에는 22개국의 대의원이 참가했고, 1904년에 열린 암스테르담 대회에는 미국 대의원 3명과 아시아 및 오스트레일리아 대의원을 포함해 25개국 노동자대표가 참가했죠.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적 활동가들은 분명히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아나키즘을 제외하고는 모든 노동자단체와 사회주의 조직을 결합하려 했으며, 따라서 제2인터내셔널에는 영국의 페이비언 협회와 같이 극히 온건한 단체까지 참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04년에 열린 암스테르담 대회에는 25개국에서 온 대의원이 45개 조직을 대표했다.
당시 국제노동운동에 참가한 조직들 가운데 노동자계급의 국제 통일을 반대하는 경우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온건주의, 개량주의, 수정주의, 기회주의, 보수주의 경향을 지닌 조직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도한 인터내셔널의 권한 강화에 의의를 제기했고, 사회주의 정당의 통일적 정치방침 작성에 반대했다.
이런 안팎의 사정을 반영하여 노동조합운동은 제2인터내셔널을 뒤흔든 이데올로기 투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당시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노동조합운동이 드러낸 주요 조류는 세 가지였다.
그 첫번째는 경제주의 또는 실리주의 노선이다. 이 형태는 주로 숙련노동자와 직업별 노조조직을 발판으로 하면서 대체로 자본주의 제도를 암묵적으로 혹은 실제로 인정했다. 이런 형태의 노동조합운동은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활발했다.
두 번째는 아나코 생디칼리즘인데, 당시에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아나코 생디칼리즘은 정당 형태가 아닌 노동자조직을 중심으로 한 정치 총파업을 통해 자본주의 제도를 철폐하려고 했다.
세 번째는 마르크스주의이다. 이 형태는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가장 우세한 편이었고 독일,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을 주요 발판으로 했다. 이런 형태의 노조들은 마르크스주의 학설과 전술 원칙을 대체로 받아들여 중앙집권의 조직체계와 산업별 노조형태를 지향했다. 그런데도 이들 노조들 가운데 많은 조직들이 투쟁과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숙련노동자층을 중심으로 기회주의 정책을 추구해서 마르크스주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제2인터내셔널의 성립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는 대중적 노동운동과 결합하였고 이제 이론 영역에서 현실 영역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아직 이념 형태로만 지니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에 실천적 전술을 결합시키면서 완성된 운동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가 인터내셔널 안에서 유일한 교의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는 각국의 다양한 사회주의 전통을 수용하는 신축적이고 탄력적인 교의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정치 이데올로기의 지형 속에서 주요 사항들에 대한 논쟁이 계속 일어났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 정세에서 국제노동운동이 절실하게 추구했던 권력 획득을 위한 투쟁의 일반노선을 설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각국의 다른 상황과 특수성 때문에 각국 정당과 노동조직의 일치된 행동을 강요하기 어려웠다.
개량주의 문제
1896년 런던 대회는 회원 자격문제를 둘러싸고 "자본주의 소유와 생산을 사회주의 소유와 생산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입법 및 의회활동을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의 하나로 인정하는 조직의 대표"와 "비록 정치투쟁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지만, 입법과 의회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한다고 천명하는 노동조합"으로 결의했다. 이런 회원 자격에 대한 결의는 명백히 아나키즘의 축출을 의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축출로 제2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이데올로기 지형을 완전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1900년 파리 총회에서는 '밀레랑주의Millerandism'의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했다. 1895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으로 1898년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공화파는 왈덱 루소(Waldeck Rousseau)내각을 출범시켰는데 이 내각에 사회주의자 알렉상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이 상공장관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유럽에서 사회주의자가 내각에 참여한 처음 사례였고, 혁명 이념과 개량적 실천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조레스(Jaurs)는 밀레랑의 행동을 두고 '새로운 전술'의 모범, '부르주아지에 대한 정치적 탈취'로 표현했으며, 밀레랑 옹호 진영은 입각이 기존체제 내에서 부분적인 개량 성과를 얻어낼 수 있으며, 반동 요소를 일정정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게드(Guesde)를 비롯한 반대 진영은 밀레랑의 행동이 당의 목표를 희석시키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원칙에 배치된다고 비난했다.
프랑스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일어난 논쟁은 1900년 파리 대회까지 이어졌다. 인터내셔널은 운동의 통일을 위협하는 논쟁의 격렬함에 불안을 느껴 양 진영의 타협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당이 승인만 하다면 그러한 타협의 단계가 '일시적인 편의로서 … 예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카우츠키에 의해 기초된 타협안이 채택되었다.[1]그리하여 인터내셔널은 밀레랑 문제에 대해 아무런 판결도 내리지 않은 꼴이 되었고 밀레랑의 행동을 용인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다음 총회에서는 일년 전에 드레스덴에서 열린 독일 사회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통과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이념을 비판하는 결의문에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해 토론이 벌어졌다. 이것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인 베벨이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지도자인 장 조레스의 비난에 저항하여 그의 당을 옹호하는 전략상 중요한 논쟁이었다. 조레스의 이론적 경직성은 선거에서의 지지율 신장과 왕권 전제체제를 변화시킬 수 없는 무기력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총회는 드레스덴 결의문에 25:5의 지지를 보냈고 12명은 기권하였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독일 대표자로서 인터내셔널에 남아 있었으며 그 양자는 자신들의 이념을 침투시켰다.
총파업과 대중파업 논쟁
총 파업을 둘러싸고도 논쟁이 확대되었다. 1900년 파리 대회에서 프랑스 게드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철폐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혁명 수단으로서 세계 규모의 총파업을 제안했다. 각국 대표들은 총파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이 제안은 대회에서 부결되었으며, 총파업 문제는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다시 제기된다.
대회에 상정된 안은 먼저 총파업과 대중파업을 구분했다. 총파업은 사회 전체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 '무정부주의적'인 행동으로 규정되었다. 정치적 대중파업은 일정한 조건에서만 즉,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에 어긋나는 반동적인 조치에 대항하기 위해 혹은 중요한 사회변화를 이끌기 위한 조건에서만 승인될 수 있는 최후 수단으로서 인정되었다. 그리고 대중파업도 그것이 일정한 조직 발전을 통해서, 계급투쟁에서 노동자들 사이의 단결과 세력 강화에 기여하는 경우에 한해서 허용된다고 강조되었고, 이 안은 대회에서 결의안으로 채택된다. 이 결의안은 사실상 사회주의 목표와 관련된 전술 수단으로서 총파업을 부인하고 매우 좁은 범위의 개량적 실천으로서 대중파업만을 인정한 것이었다.
식민주의 논쟁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다른 중요한 문제는 식민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식민주의는 보어전쟁 당시인 1900년의 인터내셔널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7년 후에 열린 슈투트가르트 회의에 참석했던 식민지 대표들 대부분은 '어떤 상황 하에서나 모든 식민지 정책을 일률적으로 거부할 수만은 없다.'고 주장했다. 즉 여기에는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개화를 목적으로 한' 식민정책의 경우를 들 수 있다.[2] 격렬한 논쟁을 벌인 후에 127:108로 이 주장은 부결되었다. '자본주의적 식민지 정책은 그 본질상 토착민들을 노예화시키고 노동을 강요하며 뿌리를 근절시킨다.'는 결의문이 통과되었다.[3]
반전투쟁에서의 갈등
반전투쟁이 인터내셔널의 핵심적인 투쟁이었으며 인터내셔널의 초창기부터 총회의 결의문에 반영되어 왔었다. 이 문제는 전쟁의 먹구름이 유럽을 뒤덮고 있을 때인 1907년에 열린 슈투트가르트 총회의 중심적인 문제였다. 여기에서 토론과정에 있어서의 심각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채택된 마지막 결의문은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을 촉구한 후에 계속되었던,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마르토프에 의해서 제출된 수정안에 흡수되었다. '어느 곳에서든 전쟁이 발발한 경우에는 전쟁의 빠른 종식을 위해서 개입해야 하고, 대중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전쟁에 의해서 생기는 모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위기를 전력을 다하여 활용해야 하며, 자본주의적 계급지배를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노동운동"의 임무이다.'[4] 이것은 다음에 계속되는 두 번의 대회에서 재확인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열린 바젤의 정기총회는 평화를 위한 시위가 되었으며 또 다시 만장일치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혁명적 투쟁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해체
2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러한 말들이 '깊이 내재된 민족주의를 폭로하는 두터운 허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5] 제2인터내셔널의 주축이 되었던 정당들은 자국의 정부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을 지지했으며, 그리하여 인터내셔널의 불명예스러운 붕괴를 유발시켰다. 이것은 자본주의 팽창의 절정이며 노동운동의 민족적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해체이후
오직 다른 당 내에 있는 소그룹들, 러시아, 세르비아, 헝가리 등의 당들만이 인터내셔널에 의해 계속 지지되었던 원칙들을 고수하였다.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전쟁 중에, 특히 중립국에 있는 당들을 중심으로 제2인터내셔널을 복구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인터내셔널 사무국은 네덜란드로 옮겨졌다. 그러나 1919년의 베른 회의는 그 해의 제2 인터내셔널의 잔영만 남은 모습으로 재구성되었으며, 다음해에 제네바에서 17개국이 참가한 총회가 개최되었다. 1921년에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PÖ) 그리고 영국 노동당을 포함한 10여개국의 좌익 사회주의자들이 비엔나에 모여 '제2.5인터내셔널'이라는 별칭이 붙은 사회당 국제 노동동맹('비엔나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것은 총괄적인 인터내셔널의 1단계였다. 1923년에 함부르크 총회에서 부활된 제2인터내셔널과 결합하여 노동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결성했고, 이것은 1940년까지 그 기능이 지속되었다. 1951년 현재 존재하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 이어졌으나, 이는 세계에 퍼져있는 사회주의 정당 및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느슨해진 연합으로서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다.
역대회의
- 출처: 줄리우스 브라운탈 (1980). 《인터내서널의 역사》, 3권, 1943–1968. 런던. 빅터 골란츠. p. 562.
사건 | 장소 | 날짜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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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대회 | 파리 | 1889년 7월 14일-19일 | 가능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한 두 개의 분리된 대회가 열렸었다. 주목할만한 결정에는 노동절 제정도 포함되었다. |
2차 대회 | 브뤼셀 | 1891년 8월 3-7일 | 최초의 통합 대회. |
3차 대회 | 취리히 | 1893년 8월 9-13일 | 주목할 만한 결정으로는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명예 회장으로 선출되고, 국제금속노동자연맹이 설립되었으며, 아나키스트들의 축출이 있었다. |
4차 대회 | 런던 | 1896년 7월 26–31일 | 주목할 만한 결정에는 민족자결의 긍정, 식민지에 대한 논의, 아나키스트에 대한 금지를 해제하라는 호소 등이 있었다. |
5차 대회 | 파리 | 1900년 9월 23-27일 | 이 회의에서 국제사회주의 사무국이 창설되었다. |
6차 대회 | 암스테르담 | 1904년 8월 14–20일 | "인도의 원로", 다다바이 나오로지가 의회에 출석하여 인도의 자유의 대의를 간청했다. |
7차 대회 | 슈튜트가르트 | 1907년 8월 18–24일 |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공동성명뿐만 아니라 청소년과 여성 단체의 창설로 유명하다. |
8차 대회 | 코펜하겐 | 1910년 8월 28일–9월 3일 | 세계 여성의 날 제정으로 유명함. |
임시 제9차 대회 | 바젤 | 1912년 9월 24–25일 | 전쟁과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추가적인 공동 선언으로 유명하다. |